강남에서 가장 물좋은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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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연애당이라 말했던 시절이 있다지만 우리 세대에게 교회는 이미 다른 종류의 커뮤니티였다. 많은 인디밴드들은 고백한다. 교회나 성당에서 악기를 배우기 시작했노라고. 없는 시절에야 부활절 달걀이나 크리스마스 선물, 성경학교라는 이벤트만으로도 아이들이 교회에 가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한국 교회의 폭발적 성장이 가능했던 이유에는 경제성장이 있었다. 도시로 모여든 지방 출신의 젊은이들, 공장 밀집지역의 젊은 여공들에게 교회는 최소한의 소속감, 또는 그 이상을 제공해주었다. 미국에서 발간되는 <크리스천 월드>가 1993년에 발표한 세계 대형 교회의 순위를 보면, 세계 10대 대형 교회 안에 한국 교회가 1위와 2위를 포함하여 5개가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이 소식은 기독교 내에서 자신들의 자부심을 강조하는 서사로 끊임없이 소환되었다. 도시화된 공간에 생겨난 대표적인 지역 교회들은 개발 시기 땅을 샀고, 수도권의 적당한 임야를 사 기도원을 지었다. 부동산 가격은 올랐고 헌금의 액수는 나날이 증가했다. 차례로 헌금의 카드 결제, 자동이체, 종교 기부금의 연말정산 등이 도입되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장로직을 맡고 있는 서울 강남구 소망교회. | 경향신문

이명박 대통령이 장로직을 맡고 있는 서울 강남구 소망교회. | 경향신문

한국 사회에서 주류 사회로 편입하는 데 필수적인 몇 가지 코스 중 하나가 개신교다. 명문고-명문대로 이어지는 학벌, 재력이 갖춰진 집안, 교회의 장로직(이명박 전 대통령마저 소망교회에서 장로가 되기 위해 주차요원을 몇 년이나 했다고 하지 않는가!), 조찬기도회 참석 등이 바로 그것이다. 개신교는 이미 종교가 아니었다. 사교의 장이고, 비즈니스의 현장이었으며, 문화자본이 ‘형제와 자매의 이름으로’ 공유되고 전수되는 곳이었다. 자녀들은 부모와 함께 대형 교회에 출석했다. 교회에서는 끝없이 성경 공부, 아버지 학교, 해외 단기 선교(사실상 해외 여행)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해 중산층의 문화에 중요한 역할을 해냈다. 이것은 우리 시대 중산층의 풍경이다.

젊은이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기로 유명한 삼일교회와 사랑의 교회는 SKY 대학 출신의 청년들이 많기로도 유명하다. 한때 이들은 강남의 웬만한 나이트보다도 ‘물이 좋은 것’으로 패션잡지에 등장했을 정도였다. 즐기고 싶다면 클럽이지만, 결혼과 연애 대상을 찾는다면 이런 교회가 적격이었다. 그러나 교회에서 청년은 여전히 계도의 대상이며 미성숙한 인격체 취급을 당했다. 한국 사회의 가장 보수적인 문화를 가진 교회라는 공간에서 ‘결혼하지 않은 성년’은 사실상 ‘나이를 먹은 학생’일 뿐이었다. 한편으로 이들은 교회 내에서 주일학교 교사 등을 맡아야 하는 일손으로 취급되기도 한다.

현재 내가 출석 중인 교회는 여자에게 목사 안수를 주지 않는 보수적인 교단 소속으로, 대예배 때는 장로를 비롯해 남자 집사가 강대상에 올라 대표 기도를 할지언정 여자 집사, 여자 교역자, 권사 등은 공식적으로 ‘대표 기도’에서 철저히 배제되어 왔다. 그녀들은 지하 식당에서 성도들을 위한 점심을 만들 때 가장 아름답다고 여겨진다. 10년 가까이 교회에 나갔지만 교역자들의 인사를 받아본 적이 없는 나와는 달리 남동생은 예배 끝나고 나올 때마다 남자 목회자들의 악수를 꼬박꼬박 받는다.

한국 개신교는 정말 문제가 많지만, 오늘처럼 지역 공동체가 사라진 때에 교회는 많은 역할을 대신한다. 우리에게는 청소년기와 청년기의 교회 기억들이 하나쯤은 있다. 종교는 사회의 사유체계를 유지하는 기능을 한다. 그리고 지금의 내 세대의 목사들은 아무리 뛰어난 목회를 할지라도 그런 부흥의 역사를 재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오직 그때였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윗 세대의 기준으로 후세대를 재단할 수 없음을 또 한 번 느끼는 것이다.

김류미<‘은근 리얼 버라이어티 강남소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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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최정예 겁쟁이들
오늘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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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전범의 아들 노다 마사아키가 쓴 <전쟁과 죄책>에는 포로의 목을 베라는 상관의 명령을 거부한 병사의 이야기가 나온다. 일본 관동군 중대장으로 근무했던 도미나가 쇼조의 증언에 따르면 중국 후베이성에서 포로를 베는 ‘담력’ 교육 도중 한 초년 병사가 “불교도로서 할 수 없습니다”라며 명령을 거부했다. 불교도로서 ‘살생하지 말라’는 계율을 지키려 했던 이 병사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홀로코스트 연구자 크리스토퍼 R. 브라우닝이 쓴 <아주 평범한 사람들>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학살 임무를 거부하고 총기를 반납한 나치 대원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독일 101예비경찰대대 빌헬름 프라프 대대장은 유대인 학살 임무에 투입되기 직전 병사들에게 “임무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면 앞으로 나오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10명 남짓 병사가 앞으로 나왔고, 그들은 소총을 반납하고 대기했다. 그 병사들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각 부대에서 학살 임무를 거부한 병사와 장교들이 속출했지만, 나치 독일의 가혹했던 군형법은 이들에게 명령불복종죄를 비롯한 어떠한 형사처벌이나 징계도 내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