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신당 당원이라는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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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겨울 열아홉 살의 나이에 나는 민주노동당에 입당했다. ‘민노당 2만 당원’이란 말이 관용어이던 시절이었다. 당원번호도 있었다. 25074였다. 당원이던 시절엔 이 번호가 내게 그다지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민노당 10만 당원’이란 말이 생기고, 친북세력에게 당을 뺏겨 탈당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되자 서글픈 마음으로 이 번호를 외웠다. 2008년 2월 탈당하여 진보신당으로 넘어왔다. 민주노동당 내 평등파 2만명 중 탈당 후 흩어지지 않고 진보신당으로 흘러들어간 7000명의 대열에 합류한 것이다.

이정희의 통합진보당과 유시민과 심상정의 진보정의당에 밀려 존재감이 제로가 된 진보신당의 당원으로서 요즘 우리 사회에서 진성당원제의 당원이 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묻곤 한다. 탈당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지만 이 마음에 차지 않는 당을 벗어나면 우리 사회에서 내가 ‘비판적으로라도 지지할 마음이 드는’ 정치세력이 하나도 없음을 자각한다. 그렇더라도 당원이 아닌 지지자로 사는 게 더 편하지 않으냐고 자문하기도 하지만 박봉에 고생하는 상근자들의 얼굴이 눈에 밟힌다. 이 당의 당원임이 자랑스럽지도 않은데 그들에게 내 한푼이라도 보태기 위해 탈당을 유예한다. 물론 다행히도 ‘진보정당의 당원’임이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 직장을 다니고 있기 때문이란 점도 크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 처음으로 원내 진출에 성공한 민주노동당 당선자들이 감사 인사를 하고 있다. | 경향신문

2004년 17대 총선에서 처음으로 원내 진출에 성공한 민주노동당 당선자들이 감사 인사를 하고 있다. | 경향신문

이러한 선택의 기로에서 주저주저하면서 나는 ‘당원’이라는 정체성이 고통을 주는 한편으로 어떤 종류의 쾌락을 주는, 일종의 중독증세가 있는 것임을 확인한다. 그리고 이 중독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물어본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무엇인가에 기여하고 있다는 느낌’일 것이다.

한국의 정치는 철저하게 여의도 중심으로 돌아간다. 의원, 보좌관, 관료, 출입기자들로 구성된 수만명 정도가 그것을 좌지우지한다. 정치평론가들 역시 그들과의 친분을 통해 정보를 얻고 그 정보를 바탕으로 판단을 내린다. 한국 사회에서 정치란 그 수만명의 의지의 총합이며, 그 수만명의 나머지 5000만명에 대한 소외다. 물론 공정함을 기하기 위해 말하자면 인류사회는 대체로 그랬고, 수십명이 수만명으로 확대된 것만으로도 한국 사회는 지난 몇백년간 인류문명이 추구해온 민주주의 질서의 최정점에 비등하게 근접해 있는 상태라고 덧붙여야 할 것이다.

당원이라는 정체성이 쾌락을 주는 지점은 아마도 이 지점에 있을 것이다. 쌓여가는 통장잔고나 끝없이 증대되는 권력에서 쾌락을 느낄 일이 없는 어떤 소시민들에게, 결코 저 ‘수만명의 리그’에 포섭될 수 없는 그 사람들에게 한 달에 1만원 내고 공무원이 될 가능성은 지워버리면서 ‘정치’라는 것에 관여한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약팀의 서포터즈들은 구단과의 거리가 가깝기 때문에 사실상 자신들이 선수들과 함께 뛴다고 여길 것이다. 내가 만난 넥센 히어로즈의 팬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선수들의 연봉을 자신들이 준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었다. 진보정당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비슷하다. 물론 이 ‘느낌’ 역시 환상일 수밖에 없지만 세상에는 환상이라는 걸 알고 소비하는 환상도 있는 것이다.

내가 속한 당은 요즘 들어 당직 선거를 하고 있다. 객관적인 조건은 암울하지만, 참고 견디면 2002년에서 2004년 사이에 그랬듯 언젠가 다시 한 번은 내가 그 당의 당원임이 자랑스러운 시기가 올 거라고 믿고 싶다. 스무 살 이후 내게 당적이 없었던 시기는 딱 2년, 병역의무를 이행할 때뿐이었다. 따지고 보면 당은 군대나 교회와 가장 흡사하다. 그래서 포기하기가 이렇게 어려운가 보다.

한윤형 <미디어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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