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무형 인수위원 없어 ‘깜짝 공약’ 기대 못해… 정보독점 밀실결정 부작용 우려 지적
‘공약집을 보라.’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는 대선공약집이 ‘근혜노믹스’를 가늠할 수 있는 유일한 ‘바이블’로 통한다. 정무적 판단에 능한 실세가 없고 교수 중심의 ‘아카데믹’한 인수위가 마련되면서 이미 예상됐던 일이다. 자율성이 거의 없는 인수위원들의 구성상 독자적인 공약들을 언급하기 힘들다. ‘촉새’를 싫어하는 박 당선인이 절대 함구령을 내린 탓도 크다. 여기다 인수위 역할도 당선인의 주요 공약 이행 방향을 담은 로드맵을 마련하는 것으로 국한됐다. 인사에 이어 정책도 ‘자물쇠’ 인수위로 운영되고 있다.
역대 인수위에서는 인수위원들의 ‘입’에 초점이 모아졌다. 당선인의 의중을 잘 알거나 당선인에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개국공신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때로 ‘점령군’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인수위원들의 힘은 강했다.

1월 10일 이현재 인수위 경제2분과 간사가 출근길에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취재기자들과 보안을 지키려는 인수위원들은 날마다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 인수위사진기자단
하지만 박 당선인의 인수위는 다르다. 일부 친박 의원들이 인수위에 참여했지만 ‘정무형’은 없다. 죄다 ‘실무형’이다. 국정기획조정분과 위원인 강석훈, 고용복지분과 위원인 안종범 의원 등이 대표적이다. 경제1분과 간사인 류성걸, 경제2분과 간사인 이현재 의원도 정책통이다. 모두 초선들로 정무적인 감각은 없다는 평가다.
과거 인수위에선 ‘실세위원 입’ 관심
때문에 이번 인수위 활동의 결과는 공약집을 거의 벗어나지 않을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추가될 깜짝 공약은 기대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공약 이행을 위해 로드맵을 마련하면서 재원 확보 방향, 정책 추진과정에서 예상되는 문제점 등을 보완할 것으로 보인다.
이런 분위기는 중앙행정기관의 업무보고에서도 그대로 반영됐다. 인수위의 업무보고는 1월 11일 시작됐다. 17일까지 46개 기관이 업무보고를 한다. 첫 보고는 국방부와 중소기업청, 보건복지부였다. 안보와 중소기업, 복지를 중요시하는 박 당선인의 의지가 반영됐다. 이날도 이현재 2분과 간사는 중기청 업무보고에 앞서 “오늘 제시되는 의견들은 인수위 공식 입장과 정책 방향을 설정하는 참고자료로 활용할 계획”이라며 “오늘은 확정된 내용이 아니기 때문에 보안에 철저를 기해주시기 바란다”고 말했다.
파견된 공무원들도 입을 닫기는 마찬가지였다. 기자들을 만나도 “미안합니다” “뭐 가서 보고합니다”라며 딴청을 피웠다. 당초 업무보고 대상에서 제외돼 있던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비밀보고’를 하러 들어가다 기자들과 마주치자 “누구 좀 만나러 왔다. (업무보고는) 아니다”라고 둘러대기도 했다. 기자들을 피하다 눈밭에 걸려 넘어질 뻔하기도 했다.
부처 분위기도 꽁꽁 얼어붙었다. 모 부처 장관은 인수위 업무보고 내용을 묻는 질문에 “나도 모른다”며 손사래를 쳤다. 김용준 인수위원장은 1월 6일 인수위 첫 전체회의에서 “인수위 내부에서 결정된 사안에 대해 누설할 경우 위원회 모든 구성원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관계 법령에 따른 응분의 책임을 지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잘못하다가 감옥도 가겠다”는 냉소가 공무원들 사이에서 흘러나온다.
상황이 이러니 공약집의 가치는 높아질 수밖에 없다. 보고를 앞둔 공무원, 인수위를 취재하는 언론은 공약집만 들여다보고 있다. 윤창중 인수위 대변인은 1월 10일 기자들과 만나 ‘업무보고에 앞서 각 부처에 박 당선인의 팁이 전달돼야 하지 않겠느냐’는 물음에 “이미 공약이 나와 있고 박 당선인의 현장 발언도 있지 않느냐”며 “그것(팁)은 인수위 차원에서 주거나 말거나 할 사안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공약집 내용을 알아서 파악하고 보고하면 된다는 뜻이냐”는 질문에 대해 “(업무보고는) 그런 내용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행간을 잘 읽어 당선인의 심중을 잘 헤아리면 100점이고, 제대로 못읽으면 0점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좀처럼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박근혜 스타일’이라는 얘기가 벌써부터 들린다. 인수위 측은 “과거에는 결정되지 않은 정책들이 보도되면서 국민들에게 혼선을 줬는데, 그런 것들을 막기 위한 조치”라고 말했다.
공약집에는 18조원 규모의 국민행복기금을 마련해 50% 부채를 탕감하겠다는 ‘가계부담 덜기’가 1번 공약이다.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가 담당할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르면 3월부터 추진하다는 얘기가 들린다. 무상보육과 무상유아교육 등 국가책임보육이 두 번째 공약이다. 대학등록금 부담을 절반으로 낮추는 교육비 걱정덜기, 암·심장병·뇌혈관·희귀난치성 등 4대 중증질환 건강보험 100% 지원 등 생애주기별 맞춤형 복지정책도 10대 공약에 포함돼 있다.

1월 10일 윤창중 인수위 대변인이 서울 삼청동 인수위원회에서 브리핑한 뒤 취재진의 추가질문을 받고 있다. | 연합뉴스
파견 공무원 입 닫고 부처 분위기도 꽁꽁
그밖에 ▲IT 문화 콘텐츠 서비스산업 투자 등 창조경제를 통한 일자리 늘리기 ▲60세 정년 연장, 해고 요건 강화 등 일자리 지키기 ▲공공부문 비정규직 근로자 정규직 전환을 담은 근로자의 삶의 질 올리기 ▲성폭력·학교폭력·가정파괴범·불량식품 등 4대 사회악 뿌리뽑기를 통한 국민안심 프로젝트 ▲대기업과 중소기업 상생의 경제민주화 ▲지역 균형발전과 대탕평 인사 등이다.
구체적 공약으로는 병사 복무기간 단축, 검·경 수사권 조정, 기초노령연금 확대, 목돈 안드는 전세제도 등도 무게감 있게 다뤄졌다. 골목상권·자영업자 보호, 중소기업 중심 경제운용, 언론 정상화, 선행학습 금지도 박 당선인의 관심이 높은 주제다. 쌍용차 국정조사, 현대차 비정규직 문제 해결 등은 주요 사회적 이슈로서 인수위 측에서 들여다볼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공약집 내용들이 너무 단조롭다는 것이다. 대선 기간에도 야권 공약에 비해 박 당선인의 공약은 큰 그림과 방향만 제시했다는 평가가 많았다. 때문에 구체적인 공약이 마련될 때 여러 목소리를 들어야 하지만 지금과 같은 시스템으로는 추후 논란이 커질 수 있다는 우려가 많다.
대표적인 것이 기초노령연금과 국민연금을 통합한 기초연금 논쟁이다. 보험료를 내는 국민연금을 국가재정으로 담당하는 기초노령연금과 통합해 노령층에게 ‘기초연금’을 지급하겠다는 것이 골자다. 이렇게 젊은층이 미래에 쓰기 위해 적립한 돈을 현 노령세대를 위해 쓰는 꼴이 되어 세대갈등이 일어날 수도 있다. 하지만 인수위 측은 국민연금에서 얼마나 재원을 끌어올지, 어떻게 통합시킬지에 대해 함구하고 있다. 주무부처인 보건복지부나 기획재정부도 마찬가지다. 인수위 인사 중에 여론 정지작업을 할 ‘정무형 인사’가 없다는 점에서 파문이 커졌을 때 진화하기 힘들 것이라는 우려도 적지 않다.
일각에서는 벌써부터 정보 독점과 비밀주의의 부작용이 시작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일부 언론은 검찰이 인수위에 ‘비밀리’에 업무보고를 했다고 보도했다. 주요 공약들이 밀실에서 결정될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여권의 한 관계자는 “과거에는 실세 의원들이 인수위에 직접 참여하지 않더라도 비선을 통해 어떻게 진행되는지 파악했는데 최근은 그런 움직임이 딱 끊겼다”며 “인수위에 괜히 관심을 기울였다 좋지 않은 소문이라도 나면 ‘한 자리’를 얻기가 어렵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실세의원들이 잇따라 일본 등으로 외유를 떠나는 것도 이런 움직임과 무관하지 않다는 전언이다.
<박병률 경향신문 경제부 기자 mypar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