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고가 아프리카에 있는 국가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을 것이다. 그러나 콩고민주공화국과 콩고공화국의 차이를 아는 한국인은 극히 드물 것이다. 콩고민주공화국(이하 콩고) 출신 욤비 토나가 한국행을 결정했을 때, 그가 한국에 대해 알고 있던 지식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에 오기 전 그가 알고 있던 것은 ‘대한민국의 수도는 평양’이라는 잘못된 정보가 전부였다.

<내 이름은 욤비> 욤비 토나 박진숙 지음·이후·1만6500원
서구 열강의 식민지배와 내전, 독재로 얼룩진 아프리카 빈국 콩고에서 욤비는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국립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했고, 졸업 후에는 콩고 정보국 요원으로 일했다. 여섯살 연하의 아내 넬리와의 결혼생활도 달콤했다. 콩고의 혼란한 정치상황이 그의 삶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2001년 콩고에서는 정부군과 반군이 대립하고 있었는데, 정부는 기득권 유지를 위해 반군과 은밀히 거래를 시도했다. 욤비는 관련 정보를 야당에 건넸다가 국가반역죄로 체포됐다. 탈출을 결심한 그는 중국을 거쳐 2002년 9월 한국에 도착했다. 행선지가 한국이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중국에서 만난 콩고공화국 친구가 한국행 초청장을 얻어왔기 때문인데, 알고보니 그 초청장은 편법으로 중국에서 옷을 들여오는 장사치들이 보낸 것이었다.
한국에서의 고생은 예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욤비는 충무로 인쇄소를 시작으로 여러 공장을 전전했다. 사료공장과 직물공장에서 일했다. 자주 월급을 떼였고 폭언에 시달렸다. 거리에서는 아프리카계 흑인을 대하는 한국인들의 낯설고 거친 시선과 부딪쳤다. 욤비의 고군분투에서 주목할 지점은 그가 난민신청을 하고 난민 자격을 인정받기까지의 과정이다. 그는 난민심사 과정에서 수차례 인터뷰를 했다. 그러나 언어장벽, 문화적 오해, 주한 콩고대사관의 방해 등으로 난민 인정까지는 6년이 걸렸다. 그 사이 욤비는 국제난민 지원단체에서 활동가로 일하게 됐다. 난민심사 인터뷰를 위해 공장 사장의 눈치를 봐야 했던 그에게는 행운이었다. 이의신청과 행정소송을 통해 2008년 2월 그는 난민 인정을 받았다. 2008년 6월에는 가족도 한국으로 들어왔다.
우여곡절을 겪긴 했지만, 욤비는 자신의 말대로 “한국에 사는 난민 가운데 특별히 운이 좋은 편”이었다. 고비마다 도움의 손길을 받았다. 그는 “나처럼 운이 좋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든 이 한국 사회가 바뀌길” 바란다고 썼다. 한국 정부는 1997년 이후 290명을 난민으로 인정했다. 2011년에는 1011명이 난민신청을 했다. 그들도 앞선 290명처럼 운이 좋을 수 있을까.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