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장벽을 허문 것은 동서독 국민의 의지다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바이츠제커는 1990년 독일 통일 당시 서독 대통령이었다. <우리는 이렇게 통일했다>는 1984년부터 1990년까지 10년 동안 그가 지켜본 독일 통일의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저자의 회고는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과 독일의 분단으로부터 시작한다. 독일 분단은 독일인들의 의지와는 무관했다. 미국·영국·프랑스의 이해관계와 소련의 이해관계가 달랐다. 분단 후 서독과 동독은 서로 다른 길을 갔다.

<우리는 이렇게 통일했다>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지음·탁재택 옮김·창비·1만5000원

<우리는 이렇게 통일했다>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지음·탁재택 옮김·창비·1만5000원

동독은 말로는 반파시즘을 내세웠다. 그러나 반파시즘은 실제로는 이를 “반대자들을 밀고하는 탄력적 도구”로 사용했다. 서독은 연방정부를 수립하고 미국이 주도한 마셜플랜의 지원을 받아 경제재건에 나섰다. 저자는 마셜플랜은 서유럽의 정치적·물질적 재건에서 중요한 초석이 되었다고 평가한다. 경제재건에 힘쓰는 한편으로 서독 정부는 폴란드 등 인접국 정부와의 외교관계 개선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전후 서독의 재건을 위해서는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역사적 비극에서 빚어진 인접국들의 불안을 해소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 통일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것은 당사자인 서독과 동독이었다. 서독은 1970년대 초부터 동독과의 긴장 완화를 위한 정책을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빌리 브란트 총리가 의회로부터 불신임을 받을 뻔한 위기에 처하기도 하지만, 서독 국민들은 1972년 총선 결과를 통해 브란트 정부의 노선을 지지한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1975년 미국과 소련, 동유럽과 서유럽을 포함한 35개국 정부 수반들이 참석한 헬싱키 정상회의는 통일로 가는 중요한 징검다리였다. 이 회의를 기점으로 동독과 서독의 민간차원 교류가 확장됐다. 결정적인 상황은 1980년대 후반에 왔다. 1985년 소련 공산당 서기장으로 선출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개혁·개방정책을 추진하면서, 소련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던 동유럽 국가 국민들 사이에서도 개방과 자유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동독은 체제 유지를 위해 이런 분위기를 묵살하려 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동독 시민들의 대규모 집회를 막지는 못했다. 1989년 10월 9일 라이프치히에서만 7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평화대행진에 참여했다. 한때 특수부대 투입이 거론되기도 했지만 더 이상 무력으로 혁명의 열기를 누를 수는 없었다.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은 끝내 무너졌다. 통일을 이뤄낸 건 결국 동서독 국민들의 의지다. 저자는 “냉전시대 열강들은 동서독의 분단을 해결해야 할 과제가 아니라 받아들여야 할 현실로 여겼다. 그러나 우리 독일인들은 공동체적 인식의 끈을 놓지 않았다”고 말한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신간 탐색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