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내 장터에는 늙은 어미들의 모습이 유난히 눈에 많이 띈다.
아우내(병천·竝川面)의 뜻을 풀자면 두 줄기의 내가 한 목으로 모여 어우러지는 곳이다. 장터 들머리에서 엿장수 맘대로 장단을 두드리는 윤씨 할배의 흥타령이 장터의 신명을 북돋운다. 아우러지는 터에 삶이 한데 아우라지니, 장터의 길목으로 이만한 데가 또 있을까. 300여년의 오랜 역사를 지닌 아우내 장터는 모두가 한데 어울리던 삶의 풍경 속에 온 민족이 하나 되어 ‘대한독립’을 외치던 역사의 아우성이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끝자리가 1과 6인 날에 장이 서는 아우내 오일장에는 요사이 새로이 정비한 현대화된 전통시장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들이 즐비하다.
장터에 들어서니 차츰 추워지는 날씨 덕에 장터는 스산하고 한가하다. 겨울 장터에 어울리는 분홍 빛깔의 겨울 내복, 털이 북실북실한 방한털신이 고향집 늙은 노모의 주름진 얼굴에 겹쳐진다. ‘인자는 고운 것이 영 좋구먼.’ 알록달록 화려하기 짝이 없는 꽃무늬 속바지가 봄꽃처럼 싱그럽던 그이의 청춘을 떠올리게 하는지도 모른다. 커다란 목련꽃 그림이 그려진 담요 빛깔이 농투성이 총각에게 시집오던 수줍던 새색시의 시절을 기억케 하는지도 모른다. 그래 5일장에서 마주하는 울긋불긋한 꽃문양은 아무래도 좋을 만큼 화려하기가 그지없다. 늙은 노모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그 꽃무늬들은 부끄럽지도 아니하고, 과하거나 천박하지도 아니하다. 시골 5일장의 풍미는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이즈음같이 계절이 바뀌는 때면 어미의 손을 잡고 털장갑 사러 가던 옛 시절의 장터가 더욱 그리워진다.
고운 어미들이 빚어내는 삶의 빛깔
어느 해 겨울, 늙은 어미의 꽃신 한 컬레 사러 장에 가던 기억을 더듬어 마흔이 훌쩍 넘은 박씨가 아우내 장터로 들어선다. 천안에 살기 시작한 지가 10년 남짓 되었다는 박씨가 아내와 함께 색깔이 도드라진 털신을 한동안 바라보며 있다. “살아계셨더라면 이 고운 ‘꽃신’ 한 켤레를 더 사드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장이 설 때마다 장터를 둘러보는데, 꼭 우리 어무이 같은 할매들이 아직도 장터에 쪼그리고 앉아 계십니다.”

본래 아우내 장터는 ‘두 개의 내를 아우른다’는 뜻으로, 조선시대부터 전국의 상인들이 몰려들던 장터다.
끝자리가 1과 6인 날에 장이 서는 아우내 오일장에는 요사이 새로이 정비한 현대화된 전통시장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들이 즐비하다. 오래 전부터 너른 터에 좌판을 깔고 장사를 해온 토박이 장꾼들의 대부분은 늙은 할매들이거나, 그 터에서 그대로 가업을 이어온 자손들이 대부분이다. 장터의 어미들은 길목에 좌판을 깔고 장을 열고, 장 골목의 둘레로는 오일장을 돌아다니는 장돌뱅이 장꾼들이 한몫을 거들며 장의 흥을 돋운다. 난롯불 위에 주전부리를 올려놓고 꽁꽁 언 손발을 녹이는 장꾼들의 모습에서 급격히 추워진 계절을 실감한다. 바짝 추워진 날씨에도 장꾼들의 신명은 여전하다. 한기를 버텨낼 요량으로 바람의 길목에서 비켜 앉은 늙은 어미들의 모습은 삶을 부대끼며 온몸으로 터득해온 지혜이다.
깍쟁이 손님도 실랑이도 없는 장터
아우내 장터에는 늙은 어미들의 모습이 유난히 눈에 많이 띈다. 장날이면 인근 마을인 병천, 수신, 동면, 북면 등에서 직접 농사지은 곡식과 채소를 조금씩 들고 나와 하루 품삯벌이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물건을 파는 어미들과 손님들의 말본새에도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가 섞여 있다. 때문에 여느 장터에서 봄직한 깍쟁이 손님도, 택도 없는 바가지나 실랑이는 찾아볼 수 없다. 어미들이 내어놓은 것이라고 해봐야 손수 만든 떡이며, 약밥, 그리고 한 동리에서 내어다 팔아달라는 푸성귀 한 소쿠리가 전부이기도 하다.
흑임자, 인절미 등 손수 빚은 떡을 내어파는 백발이 성성한 서문애 할머니가 장터에 나온 지는 올해로 꼭 65년의 세월이 흘렀다. 스물한 살에 시집을 와 줄곧 장터에 나오기 시작했다는 서씨 할머니의 세월이 궁금하다. “65년 전이니, 해방하고 전쟁 전후쯤 될라나. 그때에는 나라에서 배급으로 수수를 나눠줬는데, 그걸로 수수 지지미를 해서 내다 팔기 시작했으니까. 떡을 이고 나와 팔아서 살림에 보태고 자식들 다 키웠는데. 이제는 단골들이 찾아오는 재미로 장에 나오는 것이여.” 꽃처럼 곱던 새색시가 새벽 눈비빔으로 떡을 빚어 팔던 그 시절이 아련하다. 그 수줍던 색시의 정성과 손맛을 잊지 못하고 단골손님들이 수십년 동안 그이를 찾아오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아우내 장터는 인근 주민들이 서로의 세월을 묻고 인정을 나누던 소통의 공간이자 만남의 장소이기도 했다. 본래 아우내 장터는 ‘두 개의 내를 아우른다’는 뜻으로, 조선시대부터 전국의 상인들이 몰려들던 장터이다. 아우내 장터가 자리한 이곳 천안은 예부터 국토의 중심도시로 전국을 연결하는 사통팔달의 육로가 펼쳐져 있던 곳이다. 또 삼국의 격전장이기도 했던 이곳은 고려가 들어서기 전까지 마지막 전투를 벌였던 곳이다. 이에 태조 왕건은 ‘천하의 편안함을 기원하는 의미(天下大安)’로 천안이라 이름을 붙였다고 전해진다.

흑임자, 인절미 등 손수 빚은 떡을 내어 파는 백발이 성성한 서문애 할머니. 장터에 나온 지 올해로 65년이 됐다.
소통과 아우름의 역사적 현장, 아우내 장터
이러한 지형적인 이점 때문에 아우내에는 오래 전부터 향시가 형성되고 발달하여 왔다. 처음 장이 서기 시작한 것은 1700년대. 경상도와 한양 땅을 이어주는 길목으로 청주, 진천, 조치원, 예산 등지에서 각종 특산물을 이고 진 보따리 장수들이 장터를 이루었다. 한때는 우시장이 섰을 만큼, 인근 장터 가운데 가장 큰 곳으로 새벽부터 소를 몰고 온 장사치들 덕에 장터는 사람 반 물건 반으로 인산인해를 이루기도 했다.
특히 장이 열리는 날이면 장터 국밥집은 말 그대로 대목이었다. 아직도 간이포장막으로 볕을 가리고 바람을 막은 간이식당 안에는 사람들이 북적인다. 이미 탁주 한 사발로 흥이 절로 난 이들의 장터 자랑이 이어진다. “여기 아우내가 모두가 한데 어울리는 터 아녀. 두 물줄기가 한데 어울리는 자리란 말이지. 그리고 기미년 만세운동 때에는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모두가 한 목소리로 피를 토하던 자리 아녀. 그러니 함께 어울리는 터의 정기로 치면 대한민국에서 이만한 데가 또 없을 껴. 자 기분이다. 한 잔 허자구.” 상인들의 말처럼, 아우내는 아우라지고 어우러지는 어우름의 기운으로 모두가 하나가 되는 터이다.
태조산과 흑성산 사이에 흐르는 승천천과 흑성산과 중구봉 사이에 흐르는 산방천이 이곳 아우내, 기미의 들판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탁배기 한 잔에 흥이 절로 나는 이 터에는 상승의 어우름으로 ‘대한독립’을 외치던 민족의 아우성이 배어 있다.

아우내 오일장을 지키는 토박이 장꾼들은 대부분 늙은 할매이거나 그 터에서 가업을 이어온 자손들이다.
아우내에 오일장이 서면 장터 특유의 살맛나는 생기와 신명이 넘친다. 그 중 아우내 장터 풍경이서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입맛과 흥을 돋우는 먹거리다.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병천순대’. 장을 보러 나온 주민들과 장터 풍경을 즐기는 외지 사람들은 장터를 둘러보고 병천순대 거리까지 줄을 잇는다. 아우내 장터의 순댓국은 향시의 개설과 더불어 시작되고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장터에 쇠고기를 주재료로 하는 장국밥이나 해장국밥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소상인들과 빈농, 서민들이 먹을 만한 순댓국밥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약 50년 전으로 짐작된다. 병천순대는 한국전쟁 이후 병천에 들어선 서양식 햄 공장에서 나온 돼지 부산물로 만들어 먹던 순대이다.
지역을 대표하는 특산음식으로 하나의 브랜드가 되었지만, 처음에는 허기진 장꾼들과 오일장에 마실을 나온 손님들이 값싸고 푸짐한 맛에 즐겨 먹던 허드레 음식이었다. 이후 따끈하고 뽀얀 국물과 담백한 순대 맛이 전국에 소문나면서 15년 전부터 순대 전문 음식점들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 50여년 전 주린 배를 채워주던 순대가 천안의 명물이 된 것이다.
글·사진|이강<여행작가·콘텐츠 스토리텔러> leeghang@ti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