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장드라마 희석해주는 ‘열연’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나이가 들면 불편한 점이 늘어난다. 체력도 떨어지고 이해력도 예전만 못한 게 사실이다. 전자기기 같은 새로운 문물에 익숙해지는 데도 전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걸린다. 세월의 무게에서 오는 불편함을 한탄하다가, 나이가 들어 해낼 수 있는 것들을 발견하곤 무릎을 친다. TV에서는 중견 연기자들의 연륜이 더해진 연기가 그렇다. 아이돌 그룹의 인기도, 주름 하나 없이 예쁘고 잘생긴 젊음도 이들의 축적된 연기에는 닿지 못한다. 그게 경험이고 연륜이다. 이들의 막강 연기력은 막장드라마도 보게 하는 힘이 있다.

SBS <다섯 손가락> | SBS 제공

SBS <다섯 손가락> | SBS 제공

전광렬(52)이 MBC 수목극 <보고싶다>에서 맡은 역할은 ‘김성호 형사’다. 능력 있는 형사지만 실수로 이수연(김소현)의 아버지를 살인자로 몰게 된다. 살인자의 딸이라는 상처로 불행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 수연에 대한 죄책감으로 딸같이 돌본다. 그러던 중 수연이 괴한에게 납치된 후 사라지자 수연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수연이 성폭행을 당했다는 충격적 사실을 알게 된 전광렬은 “뭐가 이렇게 거지 같아? 이 개자식들. 은주야, 아빠 똑바로 봐. 지금부터 형사가 아니라 아빠로 (수연이를 찾으러) 갈 거야. (범인을) 잡을 거야. 잡아서 가만 안 둘 거야”라고 울부짖듯 외친다. 전광렬은 수연에 대한 죄책감 같은 복잡한 감정을 관록의 연기로 녹여내며 호평을 이끌었다. <보고싶다>는 여중생 성폭행을 묘사해 막장이라고 지탄받았으나 전광렬의 부정(父情) 연기로 막장의 낙인을 조금 덜어낼 수 있었다. 전광렬이 범인들과 추격전을 벌이다 브레이크 밑에 박혀 있던 콜라캔 때문에 교통사고로 죽는다는 막장설정도 죽음을 앞두고 딸의 이름을 읊조리는 감정연기로 덮었다.

차화연(52)은 <보고싶다>와 SBS 주말극 <다섯손가락>에서 활약하고 있다. <보고싶다>에서는 재벌 회장과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지만 아들을 뺏기며 서글픈 눈물을 흘렸다. 21세기에 <미워도 다시한번>류의 신파를 재탕하는 내용이지만, 절절한 모성 연기로 시청자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MBC <그대 없인 못살아> | MBC 제공

MBC <그대 없인 못살아> | MBC 제공

<다섯손가락>에서는 자신을 무시하는 의붓딸 채영랑(채시라)과 대립한다. 그러나 영랑이 시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내 두 눈은 멀쩡하다. 내가 이식해주겠다”고 부여잡고 통곡했다. 끝간 데 없이 달리던 ‘악녀’ 영랑이 개과천선하고, 건강이 악화되고 있다는 진부한 설정은 차화연의 연기로 희석되는 중이다. 이런 막강한 연기력은 연륜이 없다면 성립되지 않았을 듯. 차화연은 <사랑과 야망>으로 스타덤에 올랐지만 결혼 후 10여년간 활동을 중단했었다. 컴백해 보여주는 막강한 연륜은 다른 여배우들에게 귀감이 된다. 사강은 결혼 후 은퇴를 선언하면서 “내 롤모델은 차화연 선배님”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MBC <보고싶다> | MBC 제공

MBC <보고싶다> | MBC 제공

‘딸 잃어버리는 엄마 전문’으로 꼽히는 정애리(52)는 tvN <유리가면>에서 바꿔치기 당한 딸 때문에 속앓이 중이다. 지난 16일 종영된 MBC <그대 없인 못살아>에서도 젊은 시절 미혼모로 낳은 딸을 본의 아니게 버린 엄마로 나왔다. <태양의 여자>(2008), <너는 내 운명>(2008)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최첨단시대에도 눈앞에 있는 딸을 몰라보고 ‘업은 아이 3년 찾는’ 식의 한국 드라마 핏줄 찾기는 이어지고 있다. 딸 잃어버리는 엄마라는 진부한 설정, 21세기와 어울리지 않는 모순 속에서도 ‘딸 잃어버리는 엄마 전문 배우’로 거듭날 수 있는 건 진부한 설정도 납득하게 만드는 연기력 때문이 아니겠나 싶다.

<박은경 경향신문 대중문화부 기자>

클릭TV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