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영화 <도둑들>의 과묵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보스 ‘웨이홍’으로 더 널리 알려졌지만, ‘기국서’란 이름은 한때 우리 연극계에서 청년정신과 시대정신을 대표하는 아이콘이었다. 35년간 극단 76을 이끌어오면서 기국서는 <관객모독> <기국서의 햄릿> <방관> 등 수많은 문제작들을 쏟아냈고, 이로 인해 ‘한국 연극의 이단아’ ‘언더그라운드 연극의 총수’ 등의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가 보여준 자유로운 실험정신과 가난에 대한 저항의 미학은 극단 76을 정의하는 특징으로 자리잡았고, 이후 그의 영향을 받은 박근형, 김낙형 등의 후배 연출가들을 통해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다.

연극 <햄릿 6 - 삼양동 국화 옆에서>
1981년 4월,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5·18 직후의 한국 사회에 대입한 <기국서의 햄릿>이 무대에 오른 이후, 기국서는 자신의 이름을 건 <햄릿> 시리즈를 연이어 발표했다. 정치적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고, 검열제도 때문에 표현의 자유가 억눌린 상황 속에서 기국서가 들고 나온 <햄릿> 시리즈는 그 치열한 시대의식과 과감한 실험으로 인해 공연마다 큰 화제를 몰고 왔다. 또한 이 시리즈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빌려 당대의 정치·사회에 대한 직설적이고 직접적인 비판과 저항의식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이 시기 연극인들의 저항의식을 상징하는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그리고 올 가을, 22년 만의 공백을 깨고 그가 다시 <햄릿>을 가지고 무대로 돌아왔다. 지금 남산예술센터에서 공연 중인 <햄릿 6-삼양동 국화옆에서>이다. 제목의 ‘6’이란 숫자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작품은 <기국서의 햄릿> 시리즈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이다. 공연마다 당대의 가장 날카로운 사회적 이슈를 무대에 반영해온 것처럼, 이번 공연에서도 기국서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모순과 병폐를 매우 직접적이고 직설적인 방식으로 끄집어내고 있다. 30년 전 <햄릿 1>의 햄릿이 청바지를 입은 운동권 학생이었다면, <햄릿 6>에 등장하는 오늘의 햄릿은 공장 파업 후 쫓겨나 외상후 스트레스성 장애를 앓고 있는 노동자로 그려진다. 또한 햄릿이 마주하는 망령들의 독백에는 용산참사와 성폭행 피해자 등 ‘사회적 약자’라는 이유로 희생된 이들의 목소리가 중첩된다.
사실 <햄릿 6>의 전체적인 구조와 주요 장면은 지난 작품인 <햄릿 4>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첫 장 ‘우울증과 사랑’에서는 우울증에 시달리는 햄릿과 그를 사랑하는 오필녀가 독백을 하고, 2장 ‘카페 국화옆에서’에서는 햄릿을 감시하는 기관원이 등장한다. 3장 ‘악몽을 꾸다’에는 동학운동부터 5·18, 용산참사에 이르기까지 청산되지 않은 역사의 망령들이 등장하고, 4장 ‘의문사에 대한 추상’에서는 은폐되지 않는 진실에 대한 두려움이 언급된다. 이어서 5장 ‘연극이냐 현실이냐’에서는 극중극을 통해 연극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고, 6장 ‘두개의 무덤’에서는 상반되는 두 개의 무덤 사이에서 삶의 덧없음과 권력의 씁쓸함을 이야기한다.

연극 <햄릿 6 - 삼양동 국화 옆에서>
<햄릿 4>가 공연되었던 것이 1990년이니 지금으로부터 무려 20년 전이다. 그 20년 전의 대본이 여전히 우리에게 같은 의미로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은 새삼 놀라우면서도 씁쓸한 일이다. 마지막 에필로그 장면에서 햄릿은 물고문을 받고 죽은 뒤 다시 깨어나 묻는다. “이곳은, 대체 어디인가.” 이는 극중 현실과 환상 사이에서 혼란에 빠진 햄릿의 상황을 보여주는 대사지만, 한편으로는 이 연극을 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기국서의 날카로운 질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질문은 여전히, 생생하고 유효하다. 11월 25일까지 남산예술센터.
김주연 <연극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