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명물, 신포시장 먹거리 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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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최초의 근대적 상설시장으로 내외국인이 북적거리는 인천의 활력소였던 신포시장. 이런 신포시장은 해방을 맞고 한국전쟁을 치르면서 인천 도심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한다.

수도권 시민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가장 가보고 싶은 전통시장 중 한 곳이 바로 신포시장이다. 인천 최초의 근대 시장인 신포시장은 개항과 더불어 푸성귀장이 서기 시작하여 한때는 인천의 명물거리를 대표하며 호황을 누리던 장터이다. 오랜 흑백 기억으로 남은 신포시장이 다시 세월이 흘러 새롭게 변신하기 시작했다. 수도권의 명물 먹거리 시장으로 사람들의 발걸음이 잦아지면서부터다. 새롭게 발돋움을 준비하고 있는 신포시장을 찾아간다.

인천 최초의 근대 시장인 신포시장은 한때 인천의 명물거리를 대표하며 호황을 누렸다.

인천 최초의 근대 시장인 신포시장은 한때 인천의 명물거리를 대표하며 호황을 누렸다.

100년 전 근대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인천 중구는 19세기 말 인천항의 개항과 함께 서구문물이 가장 먼저 들어온 곳 중 한곳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인 자유공원, 대표적인 서민 먹거리인 짜장면의 발상지 역시 이곳 중구에 위치한 인천차이나타운이다. 당시 사람들이 붐비던 인천 개항장 거리에는 아직도 일제 강점기의 흔적들이 남아있으며, 100년 전 우리 근대문화의 유산들이 남아있다.

쫄면 발상지인 신포쫄면의 옛 가게에는 신포시장의 명물인 오색만두를 파는 유성만두가 자리잡고 있다. 주인 조정순씨(사진)의 넉넉한 인심 때문에 찾아오는 이들이 많다.

쫄면 발상지인 신포쫄면의 옛 가게에는 신포시장의 명물인 오색만두를 파는 유성만두가 자리잡고 있다. 주인 조정순씨(사진)의 넉넉한 인심 때문에 찾아오는 이들이 많다.

그 중 중구청 인근의 신포동은 외국인들이 생활했던 흔적들이 비교적 남아있는 곳 중 한 곳이다. 신포동은 19세기 말 개항과 함께 일본인·중국인·서양인들이 인천항을 거점으로 대거 밀집해 살던 곳이다. 신포시장은 당시 이들을 대상으로 고급 채소를 파는 푸성귀전이 서면서 시작된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 일본 조계지(주로 개항장(開港場)에 외국인이 자유로이 통상 거주하며 치외법권을 누릴 수 있도록 설정한 구역) 옆 공터에 자리했던 채소시장이 점점 확장하면서 급기야 채소전 거리가 된 것이다.

“신포시장이 자리한 신포동은 개항 후 생겼으며, 바다로 통하는 내가 있어 터진개 또는 탁포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신포동 거리는 서울 명동과 동대문처럼 인천의 멋쟁이들이 패션과 유행을 선도하던 멋쟁이의 거리였습니다. 신포시장 역시 우리 근대사의 역사와 함께 한 시대를 풍미한 곳이었죠. 개항 직후 산동성에서 온 농부들이 종자를 가지고 인천에 와서 채소 재배를 하여 푸성귀장을 열면서 장터가 열렸습니다.”

푸성귀는 채소나 나물 따위를 일컫는 우리의 고유어. 당시 누군가가 푸성귀를 내어 놓고 팔던 것이 점점 장터를 이룬 것이다. 이곳에서 서민들은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다양한 물건을 구입할 수 있었다. 신포시장상인회의 신현길 회장은 당시 신포시장이 인천에 거주하는 외국인들과 한국 사람들에게 매우 인기가 좋았다고 덧붙인다. “푸성귀 시장에는 사실 없는 것이 없었다고 합니다. 특히 인천항으로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면서, 서양에서 들어온 물건과 전국에서 몰려든 장사치들로 시장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고 합니다.”

명물시장으로 전통시장의 활력 다시 꿈틀
인천 최초의 근대적 상설시장으로 내외국인이 북적거리는 인천의 활력소였던 신포시장. 이런 신포시장은 해방을 맞고 한국전쟁을 치르면서 인천 도심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한다. 멋쟁이들이 주로 찾는 양품점과 음식점, 유흥시설이 들어서면서, 기존의 채소시장은 축소된다. 이후 1970년대에 들어서 점차 화교 상권이 위축되면서 외국인 상권이 축소되고, 근대화의 물결에 힘입어 우리 서민들의 상권이 점차 확대되면서 인천에서 제일 유명한 번화가로 성장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1985년 인천 시청이 구월동으로 이전했다. 인천항이 확장되고 하역작업 등으로 소음과 먼지가 발생하면서 주거 생활환경이 급격히 나빠지게 된다. 이로 인해 상권이 타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신포시장은 활기를 잃어가기 시작한다. “인천을 대표하던 명성은 많이 사라졌지요. 하지만 최근 시장을 살려보자는 여러 움직임들로 인해 우리 신포시장에 사람들의 발길이 점차적으로 늘어가고 있습니다.”

수도권 제일의 명품 먹거리 시장
인천 시민들이 신포시장을 찾아오긴 하지만, 외지에서 일부러 인천 중구의 근대유적과 차이나타운 등 신포시장 부근의 여행지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다. 이곳을 찾은 이들은 신포시장에서 아주 다양한 문화를 접한다. 시장 구경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먹을거리들. 신포시장만의 푸짐하면서도 독특한 먹을거리들이 입맛을 돋우고 발길을 잡는다. 어린 시절 맛본 추억의 음식과 전통시장의 푸짐한 인심이 이 장터의 자랑이다.

신포시장의 푸성귀장터(사진) 앞으로는 수선점 골목이 있고, 해외 소규모 무역상을 대상으로 한 원단시장을 준비 중이다.

신포시장의 푸성귀장터(사진) 앞으로는 수선점 골목이 있고, 해외 소규모 무역상을 대상으로 한 원단시장을 준비 중이다.

대표적인 명물로 이미 유명세를 치르고 있는 ‘신포닭강정’ 앞에는 길게 줄이 서 있다. 30분 이상은 줄 서야 맛볼 수 있는 닭강정은 매콤달콤한 소스에 비벼 땅콩을 듬뿍 뿌려 마무리하는데, 강렬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인상적. 27년 전통의 이 닭강정은 신포시장을 찾는 이들에게 필수 코스이다. 또 나이가 지긋한 인천사람에게 신포시장은 ‘신포만두’라는 우리 만두 브랜드의 원조시장으로 기억된다. 아직도 장터 여기저기 자리잡은 만둣집이 눈에 띈다. 쫄면의 발상지이기도 한 신포쫄면의 옛 가게에 자리한 만둣집은 고기와 야채 소를 듬뿍 넣은 오색 왕만두가 유명한 집. 카레만두, 짜장만두, 녹차만두, 김치만두, 고기만두 등 다양한 만두를 내어놓은 이 골목의 또 다른 명물이다. 

오색만두는 보기에도 좋지만 맛도 일품. 속이 꽉 찬 만두는 한 끼를 때우기에도 거뜬하다. 선선하게 손님을 맞이하는 주인장 조정순씨(유성만두)의 넉넉한 인심이 훈훈한 만두에 더해진다. 또 시장 구석구석을 둘러보면, 생활의 달인이 만드는 수제 어묵가게, 공갈빵으로 불리는 중국식 호떡가게와 손수 끓여내는 팥죽으로 유명한 맛집, 어린 시절의 추억이 담겨 있는 옛날 과자점 등 다양한 먹을거리 가게들이 늘어서 있다.

신포시장은 크게 두 갈래의 큰 골목을 중심으로 나뉜 작은 사잇길이 중간 중간 연결된 구조이다. 기존 전통시장의 점포들과 수선골목이 있고, 등대공원·푸성귀장 등의 근대유적, 조각공원 등의 문화공간이 삶의 풍경과 서로 어우러진다. 신포국제시장활성화사업단의 박진성 단장은 “신포시장의 추억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는 등대공원만 해도 우리 상인들이 자랑하는 아주 독특한 공간입니다”라고 말한다.

이미 신포시장은 지난 2010년 중소기업청 선정 국제상인시장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인천 중구 역시 본격적으로 신포시장 등 전통시장 활성화정책을 추진하며 다양한 지원책을 펼치고 있다. 근대 개항지의 문화자원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중국 시장과의 연계를 테마로 국제상인시장조성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것.

시장은 치열한 생계의 현장이자 서민들의 희로애락이 고스란히 담긴 삶의 공간이며 함께 어우러지는 문화의 광장이다. 명물 먹을거리 시장에 다시 사람들이 모여드니, 장터에 살맛이 나고 문화의 숨결이 되살아나고 있다. 잊혀져가던 전통시장의 부활, 우리 전통시장에 다시 웃음꽃이 피어나길 기원해본다.

글·사진|이강<여행작가·콘텐츠 스토리텔러> leeghang@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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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뒤척인다. 겨우내 마음 편히 잠을 자지 못해 머리에 스모그가 낀 듯 무겁다. 창밖을 보니 눈이 내린다. 이상기온이 일상이 돼간다. 기후변화의 징후인 3월 중순 눈 쌓인 풍경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고 불길하다. 자연 시스템의 불안정성만큼이나 정치와 사법 시스템 또한 아슬아슬하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둘러싼 사회적 긴장은 한국 민주주의가 직면한 불안정성을 드러낸다. 일만 년간 이어온 기후 안정성과 40여 년이 채 안 된 한국의 민주주의는 기간으로는 비할 데 아니지만, 우리 삶에 당연히 주어지는 조건으로 여겨졌던 점은 흡사하다. 이번 겨울 기후환경이든 정치체제든,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것들이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 여실히 드러났다. 기후위기와 정치위기라는 무관해 보이는 두 위기는 사실 그 원인 면에서도 맞닿아 있는데, 효율과 성과가 최우선시되는 과정에서 다른 중요한 가치는 간과했다는 점이다. 한국사회는 산업화하는 과정에서 빠르게 성장하는 법을 배웠지만, 화석 연료 중심의 에너지 구조를 전환하는 데 게을렀고, 정치적 다양성과 세대 간의 이해를 구현하지 못했다. 우리는 경쟁을 통해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지만, 이제는 그러한 방식의 성장이 우리 사회를 갉아먹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