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항해시대를 연 것은 포르투갈과 스페인이었다. 일찍부터 중앙집권화에 성공한 두 나라는 국가의 강력한 지원에 따라 해상 무역에서 경쟁 국가들을 앞설 수 있었다. 이에 비하여 영국은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인데도 불구하고 1215년에 국왕과 귀족들 사이에 맺어진 대헌장 탓에 국왕 권력에 제한되어 포르투갈과 스페인과 같은 정부 주도형 해상 무역을 시작할 수 없었다. 이 시점에서 보면 분명 영국이, 그리고 나아가 영국의 권력집중이 아닌 분산 모델이 시대에 뒤쳐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근대화의 시발점이 된 산업혁명을 그 어느 나라보다 먼저 달성한 나라는 영국이었다. 국왕이 대양 무역과 이 혜택을 독점했던 포르투갈과 스페인과 달리, 영국은 개인함대인 사략선의 업자들을 무역상으로 고용했고, 그 결과로 이들이 상공계층으로 성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선택은 국왕과 귀족에게 예기치 않았던 결과를 만들어낸다. 상공계층은 자신들의 경제적 권리를 보호받기 위해 정치적 권리를 요구했고, 1688년에 일어난 명예혁명을 통해 실제 그 권리를 쟁취한다. 상공계층은 국왕과 상원의 지주세력을 견제해 하원을 차지하게 됐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정보통신부는 해체되었고, 정보통신부의 주요기능은 방송통신위원회를 비롯한 여러 정부부처로 이월되었 다. 사진은 이명박 정부 인수위 시절, 서울 광화문 정보통신부 청사. | 경향자료 사진
이 의회는 정치적 다원주의를 지지했다. 그에 따라 새로운 기술 혁신을 통해 나타나는 파괴적 창조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이 갖춰지게 됐다. 한쪽의 이해관계에 따라 의사결정이 이뤄지는 것을 견제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같은 기술 혁신은 국왕과 귀족의 눈치를 보아야 했던 다른 국가들에서는 상대적으로 일어나기 어려웠고, 바로 이 차이가 영국을 부강하게 만들었다. 노벨경제학상 후보로 손꼽히는 MIT 경제학과의 대런 에이스모글루 교수와 하버드 정치학과의 제임스 로빈슨 교수는 그들이 최근 출간한 <왜 국가는 멸망하는가(Why Nations Fail)>에서 영국이 산업혁명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전에 명예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지목한다. 즉, 단기적으로는 계획과 통제가 우월해 보이지만, 장기적으로는 개방과 자율이 더 유효하다.
이러한 역사의 교훈을 통해 살펴보면 한때 IT 강국을 자처하던 대한민국이 2008년 아이폰 쇼크로 인해 시대의 흐름을 쫓아가는 데 급급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대항해시대의 영국보다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에 더 가까웠기 때문이다. 좁은 국토와 우수한 관료, 그리고 축적된 산업 자본과 기술력은 우리가 전자교환기 국산화부터 초고속인터넷 보급까지 성공적으로 국내 IT인프라를 갖추는 데 도움을 줬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하드웨어를 넘어선 단계에서부터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개발자, 이용자에게 유리한 환경이 보장되어야 했지만, 우리는 그 다음을 준비하지 못했다.
단적인 예로, 한국 IT의 황금기였다는 정보통신부 시절 만들어진 제도들을 보자. 이건 새로운 사회 세력들을 수용하기 위한 제도가 아니라, 그들을 배척하고 기득권의 이익을 공고화하기 위한 제도였다. 간첩 식별을 위해 만든 주민번호를 적극 활용한 ‘전국민 프라이버시 붕괴 사건’인 제한적 본인 확인제(일명 ‘실명제’)는 이후 불거진 각종 개인정보 유출 사건의 토대를 닦아줬다. 정부의 국민 감시를 도운 것이다. 인터넷 뱅킹을 쓸 때마다 인격 수양을 하게 만드는 공인인증의무제는 한국 IT 환경에 MS 독점 체제가 구축되는 데 기여했고, 우리 소프트웨어 개발 환경의 방향을 왜곡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나아가, 정통부와 이통사의 합작품 국산 모바일 플랫폼 WIPI는 전세계가 PC에서 모바일, 태블릿으로 넘어가는 시점에 한국 IT를 표류시켰다. 기존 산업 세력을 위협할 수 있는 벤처, 스타트업이 만들어질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정부가 도와서 고의적으로 죽인 것이다.
일부에서는 현재 이명박 정권에서 방통위의 종편 수용부터 망 중립성 훼손에 이르는 실책을 거론하면서 정통부 부활을 거론한다. 그러나 위와 같은 사례를 볼 때 방통위의 잘못은 정통부 시절 혹은 그 이전부터 만들어진 기득권 구조를 더 강화시켰다는 데 있다. 달리 말하면, 정통부를 살리든, 국가 CTO를 임명하든 이러한 기득권이 유지되고, 그들이 혁신과 투자를 저지할 수 있는 상황은 바뀌지 않는 한 한계가 있다. 한국 IT를 살리기 위해 필요한 것은 IT가 아니다. 그것은 기득권을 견제하고, 국민 기본권을 보장할 수 있는 정치다.
김재연<소셜 웹이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