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정해진 대선후보가 이겼다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대선시계가 빠르게 돌아가고 있다. 대선주자들은 당내 경선에 돌입하기 전에 지지율을 최대한 끌어올리기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다. 야구로 치자면 정규시즌 끝부분에서 포스트시즌으로 가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포스트시즌 중 플레이오프는 당내 경선, 한국시리즈는 본선에 해당하는 셈이다. 우리나라 프로야구에서는 정규리그 1위를 하면 한국시리즈에 직행한다. 야구 전문가들은 정규리그 1위를 해서 먼저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면 더 유리하다고 한다. 본선 진출 결정이 빠르면 그만큼 휴식기간이 길어져 충분히 체력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한국시리즈도 맞춤형으로 여유 있고 치밀하게 준비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반면 준플레이오프와 플레이오프를 거치면서 늦게 한국시리즈에 가게 되면 선수들의 체력적 문제가 발생하고, 포스트시즌을 대비해 준비했던 전략·전술을 불가피하게 선보여야 하는 경우가 많아지므로 이미 한국시리즈에 진출해 있는 팀에 고스란히 노출되는 문제가 있다. 실제로 페넌트레이스에서 1위를 해서 한국시리즈에 직행한 팀이 대부분 우승을 했다. 전후기 리그와 양대 리그로 치러진 경우를 제외한 총 21차례에서 18번이나 된다. 확률로 따지면 85%가 넘는다.

[KSOI의 여론스코프]먼저 정해진 대선후보가 이겼다

비전과 정책 제시 기회 늘어
우리 대선에서도 이런 유사한 현상이 나타난다. 역대 대선에서 정당의 후보로 먼저 확정된 인물이 대부분 당선되었다. 지난 14대 대선부터 살펴보면, 당시 여당이던 민자당의 김영삼 후보는 대선이 있던 1992년 5월 19일에 후보로 확정되었다. 제1야당 민주당의 김대중 후보는 일주일 뒤인 5월 26일에 공식 후보가 되었다.

15대 대선에서는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1997년 7월 21일 후보로 확정된 반면,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는 5월 19일, 그러니까 이회창 후보에 비해 두 달 정도 앞서 정당의 공식 후보가 되었다. 16대 대선에서는 2002년 5월 9일에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확정되었고,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는 이보다 다소 이른 4월 27일에 확정되었다. 지난 17대 대선에서는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2007년 8월 20일에, 대통합민주신당의 정동영 후보는 10월 16일에 가서야 후보가 되었다.

14대에서는 김영삼 후보, 15대에서는 김대중 후보, 16대에서는 노무현 후보, 17대에서는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공교롭게도 먼저 정당의 후보로 확정된 인물들이다.

이를 근거로 후보로 먼저 확정되어야만 대통령에 당선된다고 단정할 순 없다. 후보 결정 시기의 차이가 16대 대선 과정에서는 2주일 차이밖에 나지 않고, 14대 대선 과정에서는 불과 일주일 차이였다. 이를 보면 후보 확정의 상대적 시기와 당선과의 관계는 우연적 현상일 가능성이 높다. 다양한 변수가 영향을 미치는 대통령 선거전을 감안하면 후보 결정 시기는 어쩌면 부차적 요인일 수 있다. 그러나 확정 시기와 당선과의 직접적 연관성을 부정한다 하더라도 최종 후보를 너무 뒤로 미루는 것은 옳지 않다. 

이전에는 후보 개인 캠프의 지원만 받지만 정당 후보로 확정되면 거대 정당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게 된다. 그러면서 인력자원이 보강되기 때문에 공약과 정책을 보다 세련되게 다듬을 수 있다. 개인 조직이 아닌 정당 조직의 전국적 지원도 가능해진다. 또 후보에 대한 당내 다른 주자들의 공세가 사라지게 된다는 것도 이점이다. 위기가 오더라도 극복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갖게 된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물론 먼저 후보로 확정되면 다른 정당 주자들로부터 집중적 공세를 당한다는 점이 부담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여러 명인 상대 정당 후보들에 비해 본인이 집중적으로 부각될 수 있고, 준비한 비전과 정책을 대중들에게 더 자주 전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회로 볼 필요가 있다.

후보 확정 시기가 너무 늦어지게 되면 대중들의 알권리를 제한하는 측면도 있다. 후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공약을 준비했는지, 앞으로 어떤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지에 대해 대중들이 자세히, 오랫동안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윤희웅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 조사분석실장>

[KSOI의 여론스코프]는 이번 호를 마지막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의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KSOI의 여론스코프바로가기

이미지
용산의 역경루
오늘을 생각한다
용산의 역경루
공손찬은 중국 후한 말 북방민족들이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 정도로 위세를 떨쳤던 화북의 군벌이다. 오늘날 베이징 근처 유주를 근거지로 세력을 키웠던 공손찬은 백마의종이라는 막강한 기병대를 중심으로 황건적과 만리장성 넘어 이민족들을 토벌하며 군세를 넓혀갔다. 탁월한 군사적 재능을 갖췄으나 성품이 포악했던 공손찬은 폭정을 일삼으며 민심을 크게 잃는다. 왕찬이 기록한 <한말영웅기(漢末英雄記)>에 의하면 공손찬은 자신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본다는 이유로 부하를 죽이는가 하면 유능한 관료들을 쫓아내고 점쟁이를 측근에 등용하는 등 막장 행각을 벌였다. 하루는 백성들 사이에서 덕망 높았던 관리 유우를 저자에 세워놓고 ‘네가 천자가 될 인물이라면 비가 내릴 것이다’라고 말한 뒤 비가 내리지 않자 그 자리에서 죽여버렸다. 분개한 수만의 유주 백성들은 유우의 아들과 합세해 공손찬을 공격했고, 라이벌 원소와 이민족들까지 연합해 공격하니 공손찬은 고립무원에 처한다. 사방이 포위된 공손찬은 기주 역현에 거대한 요새를 짓고 농성에 들어가니 이 요새가 역경성이다. 자신의 남은 전력을 요새 건설에 쏟아부은 공손찬은 “300만석의 양곡을 다 먹고 나면 천하정세가 달라질 것이다”라고 말하고 외부와 연락을 끊은 채 향락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