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치스크린]연민을 걷어낸 용산참사의 진실](https://img.khan.co.kr/newsmaker/981/20120626_981_A77a.jpg)
제목 두 개의 문
영문제목 Two Doors
감독 김일란
제작국가 한국
등급 15세 관람가
상영시간 99분
장르 다큐멘터리
개봉일 2012년 6월 21일
<두 개의 문>은 근사한 영화다. 그렇다. ‘근사한’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한국에서 다큐라는 장르는 묘하게 타자화되어 있다. 요즈음 이 장르가 수행하는 역할이란 일종의 씻김굿에 가까워 보인다. 어떤 소재를 다루었다는 이유만으로 만듦새에 관한 평가는 유보되고, 관객이든 언론이든 평단이든 그 다큐에 대해 발언하는 것으로 시대와 사회에 동참하고 있다고 자족하는 판타지가 존재한다.
이런 식의 소비에는 대개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잊지 맙시다” “기억합시다”와 같은 상찬이 뒤따르는데, 결국 냉정하게 따져보면 영화가 아닌 소재 자체에 관한 의견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이런 식의 태도가 지속적으로 누적된다면 결과적으로 다큐 장르는 고사할 수밖에 없다. 되레 연성 아이템을 다루는 공중파 TV의 다큐 프로그램이 짜임새나 완성도 면에서 훨씬 빼어난 경우를 자주 보게 돼 씁쓸하다. 다큐의 결기는 소재나 현장의 돌발성이 아닌 영화적 비전으로부터 먼저 제시되어야만 한다. 나는 진영의 논리에 기반해 아군과 적군을 쉽게 식별할 수 있는 화두를 다룰수록, 감독이 활동가가 아닌 집요한 창작자로서의 태도를 고집하며 진영으로부터 쉽게 얻을 수 있는 혜택과 결별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두 개의 문>은 한 발 나아간 영화다. 어떤 사람들에게 이 영화는 필요 이상으로 차가울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에게 이 영화는 여전히 선동적일 수 있다. 그러나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건 <두 개의 문>이 2009년 1월 20일 용산 남일당에서 벌어진 사건을 다루는 데 있어서, 자기 입장을 최대한 감추는 대신 객관적 사실들을 종합하고 조립해내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최근 국내 개봉했던 <아르마딜로>와도 비견해볼 수 있다. 물론 두 영화의 형식에는 차이가 있다. 전쟁 다큐 <아르마딜로>는 스스로의 입장을 완전히 배제하는 데서 역설적으로 주관을 찾고 사유의 여지를 넓혀낸다. 한 명의 관객이 <아르마딜로>에서 숭고한 군인정신을 읽는 동안, 또다른 관객은 인지 부조화에 매몰된 전쟁광의 비열함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두 개의 문>은 그에 비하면 훨씬 뚜렷한 의도가 읽히는 다큐다. 이 다큐는 명백하게도 용산 참사의 책임이 어디에 있는지, 왜 합당한 정의는 실현되지 못했는지 보여주려 노력한다. <두 개의 문>이 <아르마딜로>와 상통하는 순간은 대상에 접근하는 태도로부터 발견된다. <아르마딜로>가 파병군인의 생활상을 그저 담아내는 것만으로 전쟁의 참상을 드러내듯, <두 개의 문>은 가해자들의 입을 통해 2009년 1월 19일부터 20일 새벽까지의 용산을 재구성한다. 도입부에 소개되듯 “이 다큐멘터리는 경찰 진술과 증거 동영상을 바탕으로 용산 참사와 재판과정을 재구성한 것”이다.
누군가는 왜 영화가 피해자들의 이야기 대신 가해자들의 말을 옮기는 데 주력하고 있느냐 타박할 수 있을 것이다. 왜 남겨진 이들에 대한 연민을 읽을 수 없느냐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진실을 규명하는 데 있어서 연민의 역할이란 자주 위선적이다. <두 개의 문>이 사건을 다루는 태도는 오히려 진압경찰의 진술과 채증 동영상, 재판 기록과 같은 공적 자료를 잘 조립해내는 것만으로도 이미 확연하게 그날 실제 무슨 일이 왜 벌어졌는지 드러내 보일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읽힌다. 남일당 건물 안의 온전한 가해자와 무결한 피해자를 식별하는 게 불가능해지는 동안, 정말 책임이 있는 주체와 그 이데올로기는 보다 뚜렷하게 구체화된다.
우리는 <두 개의 문>이라는 경험을 통해 그날의 용산을 더 많이 이해할 수 있다. 더불어 이 다큐가 다루고 있는 소재 자체-용산 참사에 관한 문제의식과는 별개로, 진실이란 결기어린 주관의 기록이 아닌 다양한 입장들의 맥락을 종합하고 이해하는 태도로부터 가장 빨리 파악될 수 있다는 사실과 마주한다. 이는 다큐 장르 자체의 본령과도 닿아 있다. <두 개의 문>이라는 제목이 향후 동시대 다큐 감독들에게 일종의 기준으로 언급되기를 기대한다.
허지웅<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