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치스크린]「프로메테우스」는 왜 걸작인가](https://img.khan.co.kr/newsmaker/980/20120619_980_A77a.jpg)
제목 프로메테우스(Prometheus)
감독 리들리 스콧
각본 데이먼 린델로프, 존 스파이츠
출연 누미 라파스, 마이클 패스벤더, 샤를리즈 테론, 가이 피어스
수입/배급 이십세기 폭스 코리아
상영시간 123분
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개봉 2012년 6월 6일
리들리 스콧 감독의 신작 <프로메테우스>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를 둘러싼 논의가 뜨겁다. 지난주 <주간경향>은 감독의 전작 <에이리언>의 성취에 못미친다는 평을 내보낸 바 있다. 이에 대해 영화평론가 허지웅씨는 <프로메테우스>가 왜 당대의 걸작이 될 수밖에 없는지를 주장하는 리뷰를 보내왔다.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편집자 주>
<프로메테우스>는 창조에 관한 이야기다. 리들리 스콧이 만들어낸 ‘프로메테우스-에이리언’의 세계관 안에서 창조는 변이에 의해 일어난다. 이 영화의 가장 첫 번째 시퀀스가 다루는 지구 생명 탄생의 첫 날을 떠올려보라. 그러므로 이 영화는 변이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환기해보면 에이리언의 세계는 끊임없는 변이와 임신, 낙태, 제왕절개, 그리고 번식에 관한 이야기였다.
앞서 에이리언 시리즈에 관한 이야기를 잠시 언급했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는 (정교하게 규정하자면) <에이리언>의 프리퀄이 아니다. 애초 이 영화의 기획이 단 한 문장으로 존재했을 때 <프로메테우스>는 “노스트로모 선원들이 맞닥뜨렸던 미지의 거대 외계인 제노모프(혹은 우리가 스페이스 쟈키라고 불렀던)의 정체가 드러나는 <에이리언>의 프리퀄”이었다. 하지만 리들리 스콧은 생각을 바꿨고 덕분에 기획 자체가 취소된 것처럼 보도되는 해프닝까지 벌어졌다.
결국 만들어진 영화는 같은 세계관과 시간대를 공유하되 정확히 <에이리언>과 이어지는 이야기가 아니다. 노스트로모가 당도했던 행성은 2122년의 LV-426이다. <프로메테우스>의 배경은 2093년의 LV-223이다. 물론 우리의 직관은 <프로메테우스>에 등장한 외계문명의 사원이 그 뒤편으로 4개나 더 솟아 있었음을 놓치지 않는다. 더불어 “이 별에는 우주선이 몇 대나 더 있어요”라는 데이비드의 말 또한 기억한다. 그러므로 <프로메테우스>의 마지막 시퀀스가 제시하는 에이리언의 탄생과 그 ‘남아있는 우주선’을 결부시켜 결국 LV-426으로 이어질 이야기의 ‘잃어버린 고리’를 조립해볼 수가 있다. 이야기가 영 찜찜한 창조론자라면 엔지니어들의 고향=천국이라고 결론지어도 좋다. 불가능한 게 뭐 있겠나. 아무튼, <프로메테우스>는 <에이리언>의 프리퀄이 아니다.
나는 리들리 스콧의 선택과 그 결과물이 매우 마음에 든다. 블록버스터라는 외피만 가지고 평가돼선 안 될 고무적인 걸작이다. <프로메테우스>를 논하기 위해 <에이리언>에 관한 향수를 끄집어내면서 그보다 낫다 못하다 논하는 중계방송이 주를 이루고 있음을 상기해보면 매우 안타깝다. <프로메테우스>는 명확한 비전과 전략을 갖고 있다. 여기에는 ‘괴물을 죽여라’식의 뚜렷한 골인 지점이 존재하지 않는다. 시고니 위버가 에이리언을 우주선 밖으로 던져버린다고 모두가 평안하게 잠들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 이 둘은 서로 전혀 다른 목적(이야기)과 전략(연출)을 가진 영화다. <에이리언>은 우주선이라는 폐쇄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호러물이고, 그에 적합한 호흡과 집중력을 가진 영화였다. 반면 <프로메테우스>는 에이리언의 유산에 기댄 팬덤 서비스, 장르적 쾌감에 충실한 오락 어느 쪽도 아니며, 차라리 얼핏 장황할 정도로 야심찬 문학에 가깝다. 기예르모 델 토로가 <광기의 산맥>의 제작을 포기하면서 이 영화를 핑계 삼았는데 이해가 간다. <프로메테우스>는 러브크래프트 소설의 장면들을 스크린에 옮겨놓은 듯 우주적인 규모의 불온함을 초연하게 구현해낸다. 사색적이고 과감하며 문학적인 서사의 결이 풍부하다. 인간 중심적인 사고의 근간을 뒤흔들어 우리가, 심지어 극중 주인공이 “인류의 멸종”이라 부르는 결과를 (고전 SF 텍스트의 선지자들이 그랬듯) 디자인이고 변이이고 진화라고 납득하게 만든다.
창조와 변이에 관한 이 이야기 안에서 인간은 엔지니어의 변이로부터 유래되었다. 극 초반 엔지니어는 인간을 잉태하기 위해 스스로를 살해한다. 극 종반 엔지니어가 수태하는 건 인간의 자궁을 통해 이미 한 번 나왔던 생명체의 반복된 변이다. 엔지니어는 강제된 잉태와 동시에 살해당한다. 이 유사근친과 존속살해의 이미지들은 “모든 아들은 아버지를 죽이고 싶어한다”는 데이비드의 대사를 통해 이미 예고된 바 있다. 그런데 이 과정은 엔지니어들의 계획과는 달리, 인간의 개입으로 인한 조율되지 않은 사건들이 끼어들어 초래된 결과다. 그렇다면 이 혼돈의 책임은 지성의 몫이다. 결국 인간에게 불을 전해준 프로메테우스는 외계 모선을 향해 질주하며 죽음을 감행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서 다음 이야기가 보고 싶다.
허지웅<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