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왜 실업자인 거야? 도대체 뭘 잘못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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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에 드러난 삶

“우리는 단군 이래 가장 많이 공부하고, 제일 똑똑하고, 외국어에도 능통하고, 첨단 전자제품도 레고 블록 다루듯이 만지고… 타이핑도 분당 삼백타는 우습고 평균신장도 크지. 악기 하나쯤은 다룰 줄 알고… 우리 부모 세대는 그 중에서 단 하나만 잘해도 아니 비슷하게 하기만 해도 평생을 먹고 살 수 있었어. 그런데 왜 지금 우리는 다 놀고 있는 거야? 왜 모두 실업자인 거야? 도대체 우리가 뭘 잘못한 거지?”

2007년 발표된 김영하 작가의 소설 <퀴즈쇼>의 한 부분이다. ‘88만원 세대’로 불리는 20~30대의 현실을 소설에 담아내 화제가 됐다. <퀴즈쇼>는 대학원까지 나온 고학력자 ‘민수’가 고시원에 살면서 편의점 아르바이트 등을 전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2월 16일 순천향대 졸업생들이 취업을 기원하며 졸업식장에 마련된 ‘취업의 벽 깨뜨리기’를 하고 있다. | 순천향대 제공

2월 16일 순천향대 졸업생들이 취업을 기원하며 졸업식장에 마련된 ‘취업의 벽 깨뜨리기’를 하고 있다. | 순천향대 제공

스펙 경쟁 낙오자 <철수사용설명서>
소설 속의 이야기는 이미 우리 사회에서 익숙한 풍경이다. 20~30대가 겪고 있는 취업난은 양질의 노동력에 비해 양질의 일자리가 턱없이 부족한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에서 기인한다. 한국은행의 조사에 따르면 2010년 기준 전문대졸 이상의 학력소지자로 분류되는 양질의 노동력은 965만명에 달하지만 양질의 일자리(평균임금 상회 상용직, 대기업 근로직, 주당 36시간 이상 근무 관리직 및 전문직) 종사자는 581만명에 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퀴즈쇼>가 발표된 지 5년이 지난 2012년에도 20~30대의 삶의 조건은 여전히 불안하다. ‘88만원 세대’ 외에도 경제적인 이유로 연애·결혼·출산을 포기했다는 ‘삼포세대’, 결혼 이후 빈곤에 허덕이고 있는 ‘허니문푸어 세대’ 등 20~30대에 드리워진 경제적 그늘을 가리키는 신조어는 더 늘었다.

지난해에 주요 작품상을 수상한 소설들도 20~30대의 그늘진 삶을 조명한 것들이다. 2011년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 전석순 작가의 <철수사용설명서>가 대표적이다. <철수사용설명서>는 ‘스펙 경쟁’의 낙오자가 된 보통 청년 ‘철수’를 보여준다. 29살의 지방국립대 출신 보통 청년 ‘철수’는 성장 과정부터 끊임없는 경쟁에 시달리다 열등감으로 위축된 20~30대의 모습을 대변한다.

<철수사용설명서>는 소설의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가전제품 설명서에서 그 형식을 빌려왔다. 취업시장에서 구직자의 학벌, 학점, 영어점수 등을 지칭할 때 흔히 쓰는 ‘스펙’은 영어 specification에서 유래했다. specification은 기계의 사양을 뜻한다. 기계의 사양을 평가하듯 구직자를 계량화하고 등급화하는 것이 당연해진 취업 현실에서 가전제품 설명서라는 형식은 철수의 ‘스펙’과 ‘성능’을 설명하기에 가장 적합한 양식인 셈이다. 지방국립대를 졸업한 후 좀처럼 취직을 하지 못하는 소설 속 철수는 스팀 기능이 없는 다리미나 얼음을 못 만드는 정수기쯤으로 치부된다.

좌절한 주인공의 자살 다룬 <표백>
지난해 ‘중앙장편문학상’을 수상한 심재천 작가의 <나의 토익만점 수기>도 치열한 스펙 경쟁을 풍자한다. 취업을 위해 토익 만점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기형적인 현상에 대한 비틀기다. 토익 590점을 맞은 주인공 ‘나’는 이대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겠다는 위기감 속에 호주로 어학연수를 떠나며 토익 만점에 모든 것을 건다. 취업이라는 평범한 삶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토익 만점이라는 극단적인 목표에 도달해야 하는 20~30대의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왼쪽부터_ 소설 <철수사용설명서> 소설 <나의 토익만점 수기> 소설 <표백>

왼쪽부터_ 소설 <철수사용설명서> 소설 <나의 토익만점 수기> 소설 <표백>

“토익 만점을 받은 친구는 취직에 성공했고, 쏘나타 신형을 뽑았다. 주말이면 여자애를 태우고 가평 펜션으로 놀러갔다. 나는 주말에 무엇을 했던가. 구립도서관에서 토익 실전문제집을 풀었다. 직장, 여자, 쏘나타 신형. 내겐 그런 달콤한 것들이 없었다. 토익을 590점 맞는 한 앞으로도 없을 것이었다. 취업 시즌이 완전히 끝난 올해 봄. 나는 서류전형 한 번 통과해보지 못하고 시즌을 접었다. ‘지원자격: 토익 800점 이상’이라는 문구에서 나는 이런 목소리를 들었다. ‘넌 꺼져.’ 그래서 난 꺼지기로 했다.”

이러한 현상은 토익 점수 ‘인플레’로 이어져 통계에서도 드러난다. 2010년 ETS 조사에 따르면 한국 구직자와 일본 구직자의 평균 토익점수는 150점 이상 차이가 난다. 한국 구직자의 평균 토익점수는 639점인 반면 일본 구직자의 평균 토익점수는 485점이다.

20~30대 청년세대의 좌절을 좀 더 극단적인 결말로 다룬 소설도 있다. 지난해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한 장강명 작가의 <표백>은 좌절한 청년 세대가 자살을 선택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주인공은 7급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나서 상위 10개 대학의 뒤쪽에 위치한 대학에 입학해서 군대를 갔다 온 복학생이다. 그는 대학입시를 다시 준비하든 편입시험을 보든 더 상위권으로 진입해야 하지만 이미 늦어버린 나이라는 생각에 딱히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다. 소설의 제목인 ‘표백’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표백세대’인 청년세대를 지칭한다. 모든 틀이 다 짜여 있는 사회에서 청년 세대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사회에 표백되어 가는 일밖에 없어 자살을 선택한다는 게 소설의 줄거리다.

20~30대의 좌절을 다룬 이러한 작품들이 출간되는 것에 대해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은 “현재 20~30대는 탈출구가 없다. 20대 내내 이력서 들고 돌아다녀야 하고 분출구가 없는 것이 소설 작품들에 드러나고 있다”고 진단했다. 한 소장은 “1%가 다 가져가고 99%가 여기에 놀아나는 게 현실이다. 한동안은 그나마 나름대로 소위 ‘스펙’을 더 키우면 돌파가 가능하다고 믿었지만 안정된 직장도 1%밖에 안 되고 취업을 해본들 80만~90만원 받고 살게 되니 희망도 없고 절망만 깊어 자살도 많아지는 것”이라며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돌파구를 뚫어내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고 말했다.

<박송이 기자 ps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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