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작가회의 신임 이사장 이시영 시인
이시영 시인의 12번째 시집 <경찰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창비)를 인터넷에서 검색하다 깜짝 놀랐다. 청소년 유해정보라며 성인인증을 요구하는 게 아닌가. 어리석게도 그 까닭을 몰라 별의별 망측한 상상을 했다.
한국 리얼리즘 시 진영의 기둥격인 이 시인은 최근 한국작가회의(이하 작가회의) 새 이사장에 취임했다. 작가회의는 자유실천문인협의회와 민족문학작가회의를 계승한 한국의 대표적인 진보 문인단체다. 이 이사장은 이 단체를 태동케 한 1974년 ‘문학인 101인 선언’ 당시 최연소인 24살의 나이로 참여한 이른바 민족·민중문학계의 베테랑이다. 이와 관련해 4차례 이상 연행·구류·구속되는 수난과 고초를 겪기도 했다.
작가회의는 최근 4년 동안 1970~80년대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사건들을 겪고 있다. 2009년 6·9선언, 즉 ‘이명박 정부의 독재 회귀를 우려하는 문학인 시국선언’을 시작으로 2010년 이명박 정부가 문예진흥기금 지원 조건으로 ‘시위 불참 확인서’를 요구한 이후 ‘저항의 글쓰기 운동’을 3년째 계속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희망버스’와 관련해 송경동 시인이 구속됐다. 송 시인과 공지영 작가 등처럼 문인들이 정치적 의사 표현이나 행동에 나서는 예도 잦아졌다.
![[신동호가 만난사람]“문인은 글 쓰는 게 가장 강력한 현실참여”](https://img.khan.co.kr/newsmaker/966/20120313_966_41a.jpg)
이런 문단 분위기를 반영하듯 이 이사장은 취임과 함께 “올해는 총선과 대선이 있는 중요한 해인 만큼 퇴행된 민주주의를 복원하고 복지와 평화, 남북화해 등에 문인들이 기여할 바를 적극적으로 찾겠다”고 말했다. 지난 3월 1일 서울시내 한 커피숍에서 그를 만났다. 그와 마주앉고 나서야 비로소 머릿속에서 깜박이기만 하던 형광등이 확 켜졌다. 그의 시집이 청소년 유해정보로 검색될 수밖에 없는 디지털 정보 소통구조에 실소하면서 엉뚱하게도 작가회의가 지금 그런 비문학적이고 반문학적 메커니즘이 지배하는 세상과 맞닥뜨리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이사장께서 취임하면서 작가회의가 젊어졌다고들 얘기하는데, 특별한 배경이나 의미가 있습니까.
“그런 건 아니고요. 최일남·구중서 전임 이사장 이후 더 이상 모실 원로가 없어서 그냥 제가 하게 된 거예요.”
작가 공지영씨가 부이사장을 맡아 더 젊어진 느낌이 드는데요.
“제가 이사장직 수락하고는 그럴 바에는 젊게 하자, 이렇게 된 거예요. 공씨는 1984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재건했을 때 초대 간사를 했어요. 작가회의와 친연성이 제일 많지 않으냐 해서 그렇게 된 거고요. 의도적으로 그런 건 아니지만 뜻하지 않게 좀 젊어졌죠. 사무총장도 그렇고….”
6·9선언 이후 문인들의 사회적 발언이나 행동이 활발한 것 같습니다. 특히 젊은 문인들의….
“요즘 ‘미래파’(낯선 시풍과 탈장르, 환상성 등으로 무장한 젊은 시인들의 경향성을 통칭하는 용어)라는 말이 떠오르듯이 젊은 문인들은 개성이 강하고 단체에 소속되지 않으려고 해요. 작가회의에도 잘 안 들어와요. 이들이 한 줄씩 자발적으로 개인 성명을 내서 그걸 모아 책도 내고 그랬죠. 용산 문제에 개입하고 희망버스에 참여하고 말이죠. 작가회의 회원도 있지만 일부는 아니거든요.”
작가회의 차원에서 ‘저항의 글쓰기 운동’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어떤 성과가 있었다고 생각합니까.
“성과에 대해서는 책임자가 도종환 시인(저항의글쓰기실천위원회 위원장)이니까 거기 물어보셔야 할 것 같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죠. 작년 강정마을 투쟁에서 정점에 달했던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작가회의는 지난해 12월 임진각에서 출발해서 1번 국도를 따라 바다 건너 제주 강정마을에 이르는 527㎞를 걷는 대장정을 펼쳤다. 제주해군기지 백지화와 강정 주민 생존권 지원을 위한 행사였다. 이 이사장도 첫 구간인 임진각에서 파주소방서까지 8.64㎞를 걸었다.
‘저항의 글쓰기 운동’ 블로그를 보니까 대문글이 ‘좋은 언어로 세상을 채우자’더군요. 사실 요즘 말이나 글이 굉장히 거칠어지지 않았습니까. 인터넷이나 SNS에서 더 그렇고요.
“그건 신동엽 시인이 주창한 것인데, 구중서 전 이사장께서 친구로서 그 뜻을 이어받아 정한 거예요. 이렇게 격한 세상이지만 언어 순화를 해야 된다, 좋은 얘기죠.”
‘저항의 글쓰기 운동’의 불씨가 된 문예진흥기금 지원은 회복됐습니까.
“아니에요. 자발적으로 안 받기로 했어요. 지난번에 신청을 했는데 각서를 요구해서 안 받겠다고 한 것 아닙니까. 홧김에 김병익 선생께서 3400만원을 내놔서 해결이 됐죠. 작년에 상임고문단 회의에서 받지 말자고 해서 자발적으로 신청을 안 했어요. 다행히 회원들의 회비가 증가하고 특별회비로 많이 충당이 돼요.”
기업이나 공익재단의 지원은 없습니까.
“없습니다.”
이 이사장은 문인 관련 사건에 여러 차례 연루된 경험이 있다. 1974년 ‘문학인 101인 선언’ 때 연행 조사를 받았고, 1978년 김지하 시인 석방운동을 벌이다 구류를 살았다. 1982년 창작과비평사(이하 창비) 편집장 시절 김지하 시인의 시집 <타는 목마름으로>를 출간했다가 안기부에 연행돼 혹독한 조사를 받았고, 1989년 황석영 방북기를 계간 <창작과 비평>에 게재했다가 구속되기도 했다. 그는 이 일들을 회고하면서 날짜는 물론 각종 숫자까지 정확하게 기억했다.
“제가 1980년에 창비에 들어갔어요. 당시 계엄 중이라서 서울시청 계엄사 검열단에 잡지 대장을 가지고 가서 검열을 받았어요. 하여간 55호, 56호를 만들고 여름휴가를 갔는데 합동통신 정진수 기자가 전화를 해서 정기간행물 174종이 폐간됐는데,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 <뿌리 깊은 나무> <씨의 소리> 등이 들어 있다는 거예요. 뭣 때문이냐고 하니까 풍속위반이라나. 1980년 7월 31일이에요.”
풍속위반이라니까… 이거 우스운 얘긴데요, 최근 낸 시집 <경찰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를 인터넷으로 검색하니까 청소년 유해 언어라며 성인인증을 요구하더군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처음 듣는 얘긴데요. 왜 그럴까요. (기자가 설명해주자) 아, 이건 농담인데, 경찰 쪽에서 고소 좀 해줬으면 좋겠는데요.(웃음)”
풍속위반이나 성인인증이나 뭐가 다를까. 그를 비롯한 문인들의 1970~80년대 수난사는 성인인증 요구처럼 실소를 자아내는 요소가 곳곳에서 발견된다. 하지만 웃을 수 없는 건 그 결과가 너무나 야만스럽고, 야만의 기운이 지금도 남아 있다고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신동호가 만난사람]“문인은 글 쓰는 게 가장 강력한 현실참여”](https://img.khan.co.kr/newsmaker/966/20120313_966_42a.jpg)
이사장에 취임하면서 퇴행된 민주주의를 복원하고 복지·평화·남북화해에 기여하는 길을 찾겠다, 이렇게 말했는데 올해 중요한 선거국면에서 어떤 역할을 할 생각입니까.
“공식적으로는 중립을 지켜야죠. 전원책 변호사부터 공지영씨에 이르기까지 회원들이 폭이 넓고 정치적 성향도 다를 수 있으니까요. 다만 대원칙에 대해서는 입장 표명을 하려고 합니다. 가장 큰 것은 민주주의의 퇴행입니다. 민주주의란 게 수많은 사람들이 피 흘리며 일구어온 건데 우리가 깜빡하던 사이에 짓밟혀 버렸잖아요. 인권위원회 보십시오. KBS·MBC사태 보십시오.”
인터뷰 이틀 전(2월 28일) 작가회의는 ‘역사의식 결여한 박정희 기념관을 폐관하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 이사장이 말하는 대원칙에 대한 입장 표명의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박정희 기념관 얘기가 나왔으니까 하는 말인데, 박근혜씨(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가 개인적으로야 장점도 많은 분이고 원리원칙주의자 같은 건 좋은데, 아버지와는 선을 좀 그어야 한다고 봐요. 자기 아버지가 모든 걸 잘못한 건 아니잖아요. 18년 장기집권하고 민주인사를 탄압한 것 등 잘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사과하고 나가야 하는데 그런 게 없는 것 같아요.”
근대문학관과 문학전문도서관 건립, 서울시 문학지도 제작, 서울 출신 문인 선양사업 등 서울시에 제안해놓은 신규 사업의 전망은 어떻습니까.
“제일 먼저 답변이 온 게 서울 출신 문인 선양사업이에요. 청계천 수표교를 복원하면 거기에 박태원 선생의 <천변풍경> 무대라는 표지석이라도 좀 세우자고 했어요. 그 옆 삼각동은 염상섭 선생의 <삼대> 무대거든요. 이상·김수영·염상섭·박태원·현진건·임화, 이런 서울 출신 문인들이 엄청난데, 지방과 너무 차이가 납니다.”
이 이사장은 우선 임의적으로 선정된 지하철 스크린도어의 시라든가 생활과 밀착한 부분부터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장기적인 과제에 대해서는 서울시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오세훈 전 시장이 디자인 서울만 할 줄 알았지 우리가 갖고 있는 진정한 문화유산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어요. 1000만 인구를 거느린 도시에 문학지도 하나 없어요. 경기도에는 문학지도가 있습니다. 일본 관광객이 이상 선생 생가를 많이 찾는데, 거기 아무런 뭐가 없다고 해요. 시립미술관은 있지만 문학전문도서관은 없어요. 독일 함부르크 ‘문학의 집’과 뤼벡 ‘토마스 만 기념관’에 가봤는데, 너무 부러웠어요. 그래서 사업 제안을 했는데 서울시에서 상당히 긍정적이에요.”
그밖에 임기 중에 꼭 하고 싶은 일이 또 뭐가 있습니까.
“박태순 선생이 책으로 낸 게 있지만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1970년대 역사를 여러 각도에서 취재해서 정리하는 사업을 하고 싶어요. 그것만 2년 안에 해도 성공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당장은 민주주의를 지켜내고 누가 보더라도 공정한 정권이 들어서도록 하는 게 급선무죠. 그 부분에서는 회원들의 열의가 대단해요.”
회원들이 어떤 역할을 하기를 기대합니까.
“제 모토가 작가회의는 문인단체니까 각자 자기 글을 제대로 쓰는 것이 중요하다는 거예요. 문인은 문학작품으로 얘기를 해야죠. 공지영씨한테 그랬어요. 넌 글 써라, 글 쓰는 게 가장 강력한 현실 참여라고요. <도가니>가 그런 역할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저께 신경숙씨가 로얄 살루트에서 주는 ‘존경받는 예술인상’을 받았는데, <엄마를 부탁해>로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전달해줬다는 게 어떤 면에서는 가장 훌륭한 사회 참여가 아니겠습니까. 다른 단체를 얘기할 것 없이 작가회의에 좋은 작가들이 많습니다. 고은 선생에서부터 갓 김수영상을 받은 서효인 시인에 이르기까지 폭도 넓고 작품을 잘 쓰는 작가들이 모여 있다는 게 가장 큰 자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이사장은 단국대 국제문예창작센터 센터장을 맡고 있다. 한국문학을 외국에 알리고 외국 작가를 초청해 학생들과 대화도 하는 역할이다. 글로벌 시대의 한국문학의 위상에 대한 그의 생각은 어떨까.
“안선재 전 서강대 교수를 석좌교수로 모시고 왔는데, 저널 같은 걸 하나 만들려고 해요. 고은 선생의 책을 많이 번역한 영국인인데 귀화를 했죠. 요즘 고은 선생에 대해 노벨문학상 얘기를 자꾸 하는데, 사실은 내로라하는 저널에 <만인보>를 비롯한 그 분의 작품이 A급 비평가들에 의해 끊임없이 논의돼야 해요. <만인보>를 ‘20세기의 대담한 기획’이라고 하고 한 로버트 하스(미국 계관시인)라든가 미셸 드기(프랑스 시인) 등 몇 사람의 언급 외에는 별로 없거든요. 진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비평가들에 의해 고은 시인이 거론돼야 하는데 그런 게 너무 안 돼 있으니까요.”
개인적인 작품활동에 대해서는 어떤 구상을 하고 있습니까.
“최근 <녹색평론>에 ‘간디의 위험한 평화헌법 구상’이라는 게 나왔더라고요. 미국의 정치학자 더글러스 러미스가 쓴 거예요. 우리나라 농촌마을이라는 게 붕괴되기 직전이잖아요. 아프리카에서는 노인 한 분이 죽으면 도서관 하나가 사라지는 것이라고 해요. 글자보다 민담으로 전승되는 게 많아서죠. 우리 전통사회도 옛날 마을 안에 보면 별 게 다 있었거든요. 살아 봐서 알지만…(웃음) 산파부터 염하는 사람까지 마을 안에 다 있었어요. 석유하고 소금만 사오는 거지 거의 마을에서 자급자족이 이루어졌죠. 물론 가난했지만요. 그런 자립에 기반한 마을공동체가 한·미 FTA가 발효되면 더 없어질 텐데 사라지기 전에 마을 탐사를 좀 해서 우선 고향 마을부터 시작해서 그런 마을에 관한 시를 쓰고 싶어요.”
<글·신동호 선임기자 hudy@kyunghyang.com,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