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르네상스의 중심 도정일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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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더 값지게 해주는 것이 인문학의 가치”

인문학 위기와 인문학 열풍. 양자적 현상처럼 이해하기도 설명하기도 쉽지 않은 경계로 들어온 느낌이다. 상반되는 두 현상이 동시에 관찰되고 있다. 인문학이 위기다, 죽었다고 하는데 막상 상자를 열어보니 엄연히 살아 있다. 인문학 붐이다, 르네상스다 하는데 하나하나 확인하면 곳곳에서 사망 또는 실종 신고를 해야 할 지경이다.

인문학 위기에 처한 대학에서 놀랍게도 인문학 교육의 꽃을 피우고 있는 데가 있다. 후마니타스칼리지, 지난해 경희대가 교양교육을 전담하기 위해 설립한 기구다. 한 대학이 별도 기구까지 만들어 체계화된 교양수업을 계획적으로 운영하기는 국내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후마니타스칼리지에는 캠퍼스별 학장(Dean)이 따로 있고, 전체를 대표하고 총괄하는 대학장(Rector·부총장 직급)을 두고 있다. 초대 대학장은 국내 인문학계 대가로서 후마니타스칼리지 설립을 주도했던 도정일 경희대 영어학부 명예교수가 맡고 있다.

[신동호가 만난사람]인문학 르네상스의 중심 도정일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대학장

지난 2월 9일 경희대 청운관 후마니타스칼리지 대학장실에서 그를 만났다. 인문학 위기 또는 인문학 열풍에 대하여, 그리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거의 모든 문제에 대한 인문학적 진단과 해법을 듣기 위해서였다.

인문학 위기라고 하지만 재계에까지 인문학 강좌 붐이 이는 걸 보면 인문학 열풍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요.
“인문학은 인문학을 전공한 사람만이 아니라 만인의 것이죠. 인문학적 가치를 무시해서는 우리 사회가 일궈내는 모든 성과나 업적이 무용지물이 될 수 있습니다. 평생 열심히 해서 돈을 벌었다 해도 살아가는 의미를 찾지 못한다면 불행할 수 있거든요. 인문학의 높은 가치는 인간의 모든 가치활동이나 실천을 한층 더 값진 것이 되게 해주는 데 있습니다.”

후마니타스칼리지가 실용교육에 치중해온 대학의 일반적 흐름과 정반대로 교양교육을 강화한 것인데, 지난 1년 동안 운영한 소감이 어떻습니까.
“전체적으로 보면 성공적이었다고 자평하고 싶습니다. 한국에서 대학 1학년생에게 이런 형태로 본격적인 교양교육을 실시하려고 한 시도가 조금 건방지게 들릴지 몰라도 이게 사실상 처음입니다. 중·고등학교에서 이런 종류의 교육을 준비하고 온 학생들이 아니기 때문에 첫 학기에는 어려움이 있었죠. 그런데 한 학기를 지나고 나니까 학생들이 굉장히 진지하고 열심히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특히 재학생들이 이런 고백을 해요. 대학 들어와서 내일모레 졸업을 앞두었는데도 뭔가 가슴이 허전했는데, 그 이유를 이제 알겠다고 해요. 그런 갈증의 상당 부분을 후마니타스 교양과목이 충족시켜주었다는 겁니다.”

신입생의 경우는 어땠습니까.
“약 70%가 만족하고 30%가 불만입니다. 너무 어렵다는 거죠. 학생들이 못 나서 그런 게 아닙니다. 우리 교육이 잘못된 데서 온 결함이에요. 그래서 신입생들은 어려운 과목을 듣느라 한바탕 홍역을 치르는데, 그 홍역은 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고등학생에게도 그런 (인문교육에 대한) 갈증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인터넷에 후마니타스칼리지 때문에라도 경희대에 가고 싶다고 글을 올린 학생이 있더군요.
“아, 그래요?(웃음) 있습니다. 후마니타스 교재를 보내달라고 하는 고등학교 선생님이 많아요. 교장 선생님까지요. 빠른 시일 안에 고등학교에서 인문학 교육을 부활하고 강화해야 합니다. 서양에서는 대부분의 고등학교가 인문학 교육을 열심히 합니다. 브라질은 고등학교에서 매주 두 시간 철학을 가르치도록 법으로 만들었습니다. 한국만 형편없이 그 수준이 떨어져 있죠.”

후마니타스(humanitas)는 ‘인간’이라는 뜻이지만 로마 철학자 키케로가 ‘문명을 만드는 인간’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도 대학장은 후마니타스 교육을 설계할 때 세 개의 핵심적인 교과목을 설정했다. 인간의 이해, 세계의 이해, 그리고 민주사회를 유지·발전시키기 위한 시민교육의 강화라는 세 가지 목표에 따른 것이었다. 교재는 각각 <인간의 가치탐색> <우리가 사는 세계> <제2의 탄생>이다. 앞의 둘은 중핵교과, 나머지 하나는 기초교과에 들어가 있다.

“입시 위주 교육을 받고 대학 들어가서 취업 준비에 목매다는 건 교육이 아니거든요. 그런 건 학원에 가서 받으면 됩니다. 대학에서는 훨씬 크고 본질적인 질문을 만나고, 거기에 응답하고, 자기 길을 모색하고, 가치의 문제를 따지고, 도덕성·윤리와 같은 본질적인 문제와 만나야 되는데 그럴 기회를 안 줍니다.”

이는 도 대학장이 생각하는 대학, 대학교육 위기의 본질이기도 하다. 대학이 무엇을 가르칠지에 대한 연구와 확신이 있어야 하고, 그럴 재원이 따라와야 하고, 의지가 그쪽으로 움직여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지금은 한 개의 심화된 전공영역만 깊이 공부해서 사회에 나가서는 바보가 됩니다. 지식의 변화 속도가 워낙 빨라 대학 때 배운 게 몇 년 후에는 헌 것이 되고 맙니다. 그때 가서 또 대학에 다닐 겁니까. 아니죠.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사회 변화, 직업 변화, 지식 변동이 온다 하더라도 그 변화를 흡수하고 거기에 대응할 수 있는 능력, 말하자면 기초체력을 튼튼히 길러주는 것입니다.”

거꾸로 가는 데도 있지 않습니까. 실용학문을 강화하는 쪽으로요.
“거꾸로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웃음) 나름의 독특한 교육 목표나 철학이 있겠죠. 대학은 다양성이 중요한 것이고, 각각의 특별한 교육 프로그램이나 철학을 얼마든지 가질 수 있습니다. 다만 어떤 별난 프로그램이라도 희생시키거나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게 있습니다. 인문학이 그 중 하나예요. 그것을 포기하고 어떤 한정된 목표나 성과를 이룰 수는 있겠죠. 그러나 잃는 게 더 많을지 모릅니다.”

인문학 위기가 아니라 대학 인문학 교육의 위기라는 말씀이군요.
“인문학이 위기라고 하지만 위기가 아닙니다. 대학에서도 그렇고 사회에서도 그래요. 미국이 대학의 교양교육을 개편하거나 그 중요성을 새삼 인식하게 되는 세 차례의 큰 위기가 있었어요. 하나는 워터게이트 사건입니다. 그 사건에 관여된 사람들이 일류대학을 나온 유수 인재들이었어요. 대학이 깜짝 놀라죠. 젊은이들을 어떻게 길렀기에 범법자로 나가는가라고요. 그게 큰 자극이 돼서 교양교육 강화라는 요구가 드러나게 되죠. 하버드대학이 그래서 교양교육 개편작업에 들어갑니다. 한국에서 유명해진 마이클 샌델이 하버드대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도덕철학을 강의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워터게이트 사건 이후 바뀐 대학의 인식을 반영한 것입니다.”

두 번째 큰 사건은 2008년 금융파동이다. 그때도 월스트리트의 파산한 금융회사들은 전부 일류대학에서 경영학 계열의 공부를 한 우수한 인재들이 일하고 있던 회사들이었다. 그게 줄줄이 엎어지자 대학, 특히 이번에는 경영대학원들이 깜짝 놀란다. 그래서 지난 몇 년 동안 미국 경영대학원들은 교과 내용을 대폭 개편한다. 인문학 교육을 넣고 대학 1학년 때 하는 것과 비슷한 교양과목들을 대학원에 들여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번에 또 놀라운 현상이 하나 있습니다. 중국 교육의 각성입니다. 공산주의 사상과 기술 교육을 결합시킨 것을 교육의 중추로 놓고 진행해온 것이 그동안의 중국 대학교육의 특징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변화가 세차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인문학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중국 사람들 바보가 아닙니다. 대국으로 올라설 모든 준비를 하고 있고, 미래의 중국에 필요한 인재 양성을 국가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심지어 미국에서는 ‘인문학이 미국을 떠나서 중국으로 갔다’고 얘기합니다.”

[신동호가 만난사람]인문학 르네상스의 중심 도정일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대학장

최근 국내외에서 벌어지는 정치·경제·사회적 위기의 근본 원인도 인문정신의 부재나 훼손에서 찾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맞습니다. 자본주의가 위기라고 그러잖아요. 실제로 위기거든요. 그럼 이 위기가 뭘까요. 1대 99의 사회를 떡 만들어놓으니까 누가 그 사회에 만족하고 누가 그 사회에서 행복을 느끼겠습니까. 달리 말하면 정의의 문제입니다. 정의는 정치나 사회과학의 문제이기에 앞서 도덕철학의 문제이고 인문학의 문제입니다.”

도 대학장은 ‘공존의 정의’와 ‘공생의 윤리’를 이야기했다. 공존은 ‘나도 살고 너도 살자’는 것이고, 공생은 한 차원 더 끌어올려 ‘네가 살아야 나도 산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위기는 공존의 정의와 공생의 윤리가 바닥에 떨어진 데서 비롯된 것이고, 그런 상태로 자본주의는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경제 민주화, 안철수 현상, 월스트리트 점령사태 등 최근 정치·경제·사회 이슈의 밑바탕에도 깔려 있는 문제다.

요즘 문제가 되는 학교폭력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학교폭력에 대해서는 저는 조금 다른 개념으로 교육폭력이라는 말을 씁니다. 학교에 가서 선생님한테 인정받고 환영받고 사람 구실을 하는 아이는 공부 좀 하는 경우거든요. 못 하는 아이들은 병신 취급 받습니다.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교육을 파괴하는, 교육 그 자체의 폭력성을 말하는 겁니다. 교육의 구조가 폭력성을 띠었을 때는 반드시 폭력적 성향의 아이들을 길러내게 됩니다. 그 폭력이 학교 다닐 때 터져나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이후까지 봐야 되거든요. 사회에 나가서도 언제든 터질 수 있는 겁니다. 이 부분은 아이들 책임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어른들의 책임입니다.”

참 어렵고 해결할 길이 보이지 않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우리 젊은 엄마들 보세요. 누가 뭐래도 귀에 안 들립니다. 내 아들 일류대학에 가야지, 저 학교에 넣어야지, 이것 외에는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이 엄마들을 누가 어떻게 일일이 설득합니까. 교육의 구조를 바꾸고 방식을 바꾸는 수밖에 없습니다. 정치권이 지금 여러 가지 문제에 집중하고 있지만 경제 민주화 못지않게 한 나라의 미래, 한 세대의 명운이 걸려 있는 문제가 교육문제입니다. 공교육 파탄, 학교폭력, 사교육, 이런 게 전부 교육폭력과 연결돼 있는 문제예요. 정치권이 나서줘야 합니다. 정책을 만들어 내놔야 합니다.”

올해가 선거의 해이고, 정치권도 변화의 물살을 타고 있습니다. 정치권의 문제도 원인을 파고들면 결국 인문학적 가치의 문제로 귀결될 것 같은데요.
“그런 거죠. 정치인 보고 인문학 공부하라는 게 아니에요. 인문학은 우리 삶의 모든 구석구석에 배어 있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한다, 어떤 사람을 내가 걱정해준다, 이런 것들이 인문학적 관심이거든요. 정치인들이 입으로는 그런 말을 합니다. 지행합일(知行合一)은 동양이 내놓은 위대한 인문학적 명령입니다. 서양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가 똑같은 얘기를 했습니다. 정치인들은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 말과 실천이 늘 따로 놉니다. 일치시키려고 조금만 노력하면 굉장한 인문학적 실천이 됩니다.”

도 대학장은 인문학의 궁극적인 책임에 대해 말했다. 인간에 대한 책임, 사회에 대한 책임, 역사에 대한 책임, 문명에 대한 책임을 방기하지 않고 망각하지 않는 것이 인문학과 인문학 교육의 책임이고, 바로 그게 인문정신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그는 목소리를 높였다.

“정치가 인간에 대한 책임을 느끼고 있나요. 역사도… 얼마나 잘못된 역사입니까. 억압의 역사, 파괴와 살육의 역사… 끊임없이 그걸 해왔잖아요. 문명도 우리가 말이 좋아서 문명이지 얼마나 야만스러운 짓을 많이 해왔습니까. 인간과 사회, 역사, 문명에 대해 늘 책임을 생각하고 그렇게 생각할 줄 아는 인간을 키우는 것이 인문학의 할 일이자 기본 정신입니다.”

후마니타스칼리지의 인문학 교육이 좋은 성과를 냈으면 합니다.
“공식 조사는 아니지만 몇몇 샘플을 조사한 게 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지 10년, 20년, 30년 되는 사람한테 대학에서 받은 교양교육 중에서 교수나 과목이나 내용 중에서 머리에 남는 게 뭐냐는 질문을 했어요. 또 하나의 질문은 구체적으로 기억하지는 못하더라도 대학 교양교육으로 어떤 혜택을 받았다고 생각하느냐는 것이었어요. 대답은 안타깝게도 거의가 부정적입니다. 교양교육의 위대한 힘이 어디 있느냐면 그 효과가 졸업 후 바로 나타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심할 경우에는 40대, 50대에 가서 아, 그때 받은 교육이 참으로 유용했구나, 이렇게 판단이 서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교양교육이라는 게 그런 거거든요. 교육의 효과가 장기적이고, 쉽게 금전적 가치로 환산할 수 없습니다. 그걸 안다면 대학교육도 바뀌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글·신동호 선임기자 hudy@kyunghyang.com,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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