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헤겔: 그의 철학적 주제들> 프레더릭 바이저 지음·이신철 옮김 도서출판b·2만4000원
얼마 전 인터뷰한 슬라보예 지젝은 조만간 1000 페이지가 넘는 엄청난 헤겔에 대한 책을 출간할 계획이라고 했다. 제목은 헤겔이지만 내용은 정치에 관한 책이라고 귀띔하는데, 왜 하필 헤겔이냐고 물으니 대답은 “헤겔이 살았던 시절과 비슷한 현실을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란다. 헤겔이 살았던 1790년대는 어떤 시대였을까? 한 마디로 이 시대의 특징을 정리해주는 말은 ‘계몽의 위기’라고 지정할 수 있겠다.
이성에 대한 신앙은 붕괴하고 허무주의가 대두했다. 헤겔 자신도 목소리 높여서 계몽의 문제점을 비판했다. 물론 그렇다고 그가 계몽의 유산 자체를 내다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은 아니다. 그의 철학이 추구했던 것은 계몽에 대한 회의로 인해 빚어진 이성에 대한 불신을 극복하고, 이성의 권위를 복원시키는 것이었다. 지젝이 헤겔에 관한 책을 출간하겠다는 것은 헤겔철학에 도전한 반계몽주의적인 기획에 대해 동일한 문제의식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헤겔의 저작을 철학적 훈련을 거치지 않은 평범한 독자가 읽는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라고 하겠다. 전해지는 일화 중에서 헤겔을 흠모한 나머지 직접 그의 강의를 들어보기 위해 러시아에서 온 군인 장교에 관한 것이 있는데, 학구열을 불사르며 서점에서 헤겔의 저서를 모두 구입한 이 장교는 아무리 읽어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문장들 때문에 아예 아침 산책에 나선 헤겔을 졸졸 따라다니면서 온갖 질문을 던져 귀찮게 굴었다고 한다. 더할 나위 없는 철학수업이라고 할 만하다.
헤겔이 세상을 떠나버린 지금 이 장교와 같은 호사를 누린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래서 훌륭한 헤겔 입문서가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미국 시라큐스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프레더릭 바이저의 <헤겔: 그의 철학적 주제들>은 헤겔에 대해 궁금한 독자들을 위한 친절한 안내서다.
이 책의 첫머리에서 다음과 같은 진술을 읽을 수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헤겔의 텍스트는 철학의 역사에서 가장 나쁜 산문이라고 할 만한 것들로 쓰여 있다. 텍스트들의 언어는 치밀하고 모호하며 이해하기 어렵다. 헤겔을 읽는 것은 종종 괴롭고 진 빠지는 경험이며, 이를테면 지적으로 모래를 씹는 것과 마찬가지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렇게 이해하기 어려운 헤겔의 철학책을 ‘왜 읽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이 지점에서 제출되는 것이다. 바이저의 말대로, 이 지루하고 난해한 철학서를 읽으며 시간 낭비하기에 인생은 너무 짧다는 핑계를 쉽게 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헤겔을 읽어야 할 이유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뿌리’를 이해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문화는 헤겔 이전과 헤겔 이후로 나뉜다고 할 정도로 헤겔의 철학은 강력하게 근대 이후 사회에 영향을 미쳐왔던 것이다.
현재의 문제를 풀고, 사유를 혁신하기 위해 헤겔은 끊임없이 대화의 파트너로서 당대 철학자들에게 불려나왔다. 그 결과 헤겔을 통과한 다양한 사유의 방식들이 현대철학을 수놓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이런 헤겔의 생명력을 이해하기 위한 단초들을 친절하게 제공한다. 앞에서 헤겔철학의 배경과 맥락을 설명하고, 뒤에서 본격적으로 헤겔의 개념들을 파고드는 식이다.
개인적으로 재미있었던 부분은 제4부 사회철학과 정치철학이었다. 오늘날 헤겔을 읽는다는 것도 형이상학적인 주제보다도 사회와 정치에 대한 그의 통찰을 참조한다는 것에 가깝다. 헤겔의 <법철학>은 플라톤의 <국가>나 홉스의 <리바이어던>에 필적할 만한 고전으로 꼽히기도 한다. 그러나 바이저는 이렇게 형이상학적인 헤겔과 현실적인 헤겔을 구분하는 것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다. 헤겔의 법철학 자체가 “자기의식적으로 법을 형이상학으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하는” 근대 법학의 실증주의를 반대하는 입장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바이저의 주장은 헤겔을 형이상학적으로 읽자는 것이 아니라, 형이상학을 전제하지 않고 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 문제가 헤겔 독해의 이슈라는 것을 그의 주장이 다시 환기시켜준다.
이택광<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