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0년 동안 대한민국의 비약적인 발전을 주도해온 발전적 보수와 합리적 개혁의 역사적 정통성을 계승하는….’ 한나라당의 정강정책 전문에 들어가 있는 내용이다. 이 중 ‘발전적 보수’는 2004년 3월 한나라당의 천막당사 시절 개정하면서 추가된 문구다.
당시 한나라당은 이른바 차떼기 사건으로 수구·부패·기득권세력이라는 인식이 대중들에게 넓게 퍼져 있었고, 이를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이 와중에 ‘발전적 보수’는 기존 수구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 채택한 표현 중의 하나였다. 8년이 지난 지금, 한나라당은 다시 위기를 맞고 있고 비상대책위에서는 ‘보수’라는 표현을 폐지해야 한다며 도마 위에 올려놓고 칼을 내리치려 하고 있다.
왜 한나라당은 보수의 겉옷을 벗으려고 할까. 두말 할 것 없이 ‘보수’로는 장사가 안 되기 때문이다. 대중들의 표를 먹고 사는 정당은 대중들의 식성을 따를 수밖에 없다. 최근 대중들의 정치적 이념성향을 보면, 오른쪽 보수에서 중도나 진보를 향해 왼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보수라고 밝히는 유권자들이 계속 줄고 있는 것이다.
진보와 중도, 그리고 보수로 나누어 본인의 정치적 이념성향이 어디에 해당한다고 보는지 질문해 보았다. 보수는 23.3%에 그쳤다. 중도는 31.7%, 진보는 38.9%였다. 보통 때에는 중도가 가장 높고 보수와 진보가 적절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경우가 일반적인데 지금은 진보 쪽으로 상당히 기울어져 있다. 보수 대중들은 얇아지고 진보 대중들은 두꺼워지고 있는 것이다. 보수라고 스스로 규정짓는 유권자들은 줄어들고 있는데, 득표를 극대화하고자 하는 정당이 계속해서 보수를 자임할 수 없는 일임은 당연한 것이다.
중도 제외한 대답
“보수 35.5%, 진보 58.8%”
보수층의 축소, 진보층의 확대 현상은 이명박 정부에서 더욱 도드라졌다. 참여정부 후반부인 지난 2007년 2월 조사에서는 보수가 37.2%로 중도 25%, 진보 32.1%에 비해 높았다. 당시는 진보정권이라는 참여정부의 인기가 바닥을 치는 시기였다. 당연히 진보 대신 건너편의 보수에 대한 기대감이 커졌고, 스스로 보수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념관이 뚜렷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많은 경우 당시 집권하고 있는 정치세력에 대한 평가를 기반으로 본인의 정치적 성향을 규정하는 경향이 있다. 2007년에도,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해당 정권이 내리막길에 있을 때 해당 정권의 정치적 성향과 반대되는 이념성향이 높아지게 마련인 것이다.
한편에서는 진보와 보수의 변화가 심하더라도 중도가 두껍게 존재해 균형을 잡고 있기 때문에 오래지 않아 원래대로 회복될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그래서 이런 대중들의 성향 변화를 무리하게 따라가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중도라고 해서 항상 무색무취한 게 아니다. 중도도 경향성이 있다.
진보·중도·보수 중 어디에 해당하냐고 묻는 대신 진보와 보수 어디에 더 가깝냐고 양자택일을 하게 하면 중도가 어떤 경향을 지니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진보와 보수로만 질문했을 때 보수는 35.5%, 진보 58.8%로 진보가 월등히 높았다. 중도의 상당 비율이 보수보다는 진보에 더 가깝다고 응답한 것이다. 이러한 보수와 진보 간 비율도 2007년 2월 조사와 비교해보면 보수보다는 진보가 훨씬 두꺼워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개의 커다란 선거가 눈앞에 닥쳐 있는 상황에서 까다로운 입맛을 보이는 대중을 위해 새로이 식단을 짜야 하는 한나라당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과연 한나라당은 새 옷을 갈아입고 진미를 내놓을 수 있을지.
윤희웅<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 조사분석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