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사회적 역할은 무엇일까. 시인은 흔히 잠수함의 토끼에 비교된다. 잠수함 속 공기 부족을 경고하는 토끼처럼, 시인은 예민한 감수성으로 사회적 억압을 그 누구보다 먼저 감지해 경고음을 발신하는 존재다.
2011년 한국 사회는 그런 시인을 잡아 가두는 사회다. 시인의 경고는 ‘특수공무집행방해’나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간주되고, 시인은 “도주 및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는” 사람쯤으로 취급된다. 희망버스 기획자로 지목돼 정진우 진보신당 비정규실장과 함께 구속수감된 송경동 시인 이야기다. 그의 첫 산문집의 제목이 <꿈꾸는 자 잡혀간다>로 결정된 건, 시인의 산문집에 걸맞은 시적 비유의 소산이 아니라 실제 현실을 가감없이 제목에 반영한 결과다.
시인은 형제가 넷이다. 스무 살 무렵에는 호적을 파버리려고 혼자 동사무소를 찾아가기도 했다. 아버지는 노름에 빠졌고 어머니의 눈은 종종 멍이 들었다. 어머니가 집을 나갔을 때 시인은 “더 이상 싸움이 없는 고요가 찾아왔다는 것이 너무도 행복했다.”
문학과의 첫사랑은 상처의 기억으로 남았다. 어느날 그가 활동하던 고등학교 문예반 회원들이 교무실에 불려갔다. 1980년 광주에 대한 시를 쓴 게 화근이었다. 3학년 선배 두 명이 무기정학을 받았다. 2학년 친구 둘은 유기정학을 받았다. “내가 나를 사랑해줄 수 있는 딱 하나 남은 공간”이 교사들의 검열 속에 영문없이 사라졌다. 시인은 “내 운명이 타고난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재조직된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비합리적인 교사들의 검열은 훗날 시인의 사회적 삶에 대한 이 사회의 검열로 대체됐다.
시인은 노동시를 많이 썼다. 그러나 그는 노동시를 쓰는 시인이기 이전에 그 자신이 노동자였다. 서울에선 청계천 2가 공구상가에서 일용직 잡부로 일했다. 그의 세 형제들도 노동자였다. 그는 때로는 목수로, 때로는 철공장 잡부로, 때로는 용접보조로 일했다. 그렇게 생계를 이었고 시를 쓰며 아름다운 삶을 꿈꾸었다.
그도 “여느 시인들처럼/꽃을, 사랑을 노래하고” 싶었다. “한 잔의 맑은 녹차와 어우러지는/양장본 속 아름다운 시인으로 기억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아름다운 시인”이 되지 못하고 ‘거리의 시인’이 됐다. “아름다운 것들을/아름답다고만 노래할 수 있는/그런 해방된 사회를 가질 수만 있다면” 그도 평범한 시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결국 소망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국가보안법 철폐 집회, 대추리, 한·미 FTA 반대집회, 기륭전자, 용산참사 현장 등 1987년 이후 한국 사회가 되찾았다고 믿어온 민주주의의 아킬레스건이 적나라하게 노출된 곳들만을 찾아다녔다. 김진숙 지도위원이 크레인에서 309일을 버틴 한진중공업 영도 조선소는 그 중 하나일 뿐이다.
산문집 <꿈꾸는 자 잡혀간다>는 글의 온도가 뜨거운 책이다. 어떤 뜨거움인가. 이명원 평론가는 책 추천사에 이렇게 썼다. “고압적인 긴장과 파괴적인 억압으로 팽창된 현실에서, 그의 시와 산문이 열망하는 것은 새로운 사회와 인간의 연대를 위한 희망이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