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까운 순직과 반짝 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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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에 처한 인간을 향하여, 그 재난의 한복판으로 달려드는 건장한 젊은이들이 저렇게 사이렌을 울리며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은 인간의 인간다움이 아직도 남아 있고, 정부와 국가의 기능이 정확하고도 아름답게 작동되고 있다는 신뢰감을 느끼게 한다. 인간만이 인간을 구할 수 있고, 인간만이 인간에게 다가설 수 있으며, 인간만이 인간을 위로할 수 있다는 그 단순명료한 진실을 나는 질주하는 소방차를 바라보면서 확인한다.(김훈 ‘인간에게 다가오는 인기척’ 중에서)

2003년 3월 어느 화재현장에서 불길에 맞선 한 소방대원이 뜨거운 불길과 매케한 연기를 무릅쓰고 불길을 잡고 있다. /서성일 기자

2003년 3월 어느 화재현장에서 불길에 맞선 한 소방대원이 뜨거운 불길과 매케한 연기를 무릅쓰고 불길을 잡고 있다. /서성일 기자

12월 3일 오전 경기 평택시 서정동 가구전시장에서 화재 진압과 인명 구조작업을 하던 송탄소방서 119구조대 이재만 소방장과 한상윤 소방교가 숨졌다. 이들은 철수를 하다 무너진 천장 구조물에 깔려 죽었다. 각각 부인과 자녀 두 명을 두고 있다. 올 들어 소방공무원 6명이 죽었다. 소방관들은 죽음에 직면해 있다. 불타는 구조물과 잔해는 그 자체가 무기이자 날벼락이다. 수많은 소방관들이 깔려 순직했다.

1977년 9월 14일 남대문시장에서 큰 불이 나 300여 점포가 전소됐다. 상인들 인명피해는 없었다. 미8군 소방대 이재곤 부대장이 무너져내리는 건물벽에 깔려 순직했다. 1978년 11월 1일 수원 삼성전자 공장에서 불이 났다. 덜 꺼진 담뱃불이 화인이었다. 수원 중부소방서 윤상욱 소방관이 지붕에서 내려앉은 철근에 맞아 숨졌다. 그는 보증금 10만원 월 6만원짜리 삭월세방 한 칸에 부인, 남매와 함께 살았다. 

2011년 3월 23일 서울 서대문구 아현동 가구상가 밀집지역에서 불이나 소방관들이 연기 속에서 화재진압 작업을 하고 있다. / 이상훈 선임기자

2011년 3월 23일 서울 서대문구 아현동 가구상가 밀집지역에서 불이나 소방관들이 연기 속에서 화재진압 작업을 하고 있다. / 이상훈 선임기자

1988년 3월 6일 충북 충주시 새한미디어 공장 화재로 충주소방서 이성우 소방교가 순직했다. 그는 테이프조립실과 성형실 사이 무너진 벽돌더미에서 발견됐다. 2000년 10월 25일엔 소방관 임은종씨가 강서구 화곡본동 2층 건물에서 진압하다 건물벽과 바닥이 무너져 숨졌다. 스물다섯 나이였다. 2007년 11월 28일 경기 이천시 CJ 이천공장 화재현장에서 숨진 윤재희 소방사는 당시 스물아홉 나이로 결혼식을 2개월 남겨두고 있었다.

2001년 3월 4일 서울 서대문구 홍제1동 2층 주택 화재 때 진화작업과 생존자 구출작업을 하던 서울 서부소방서 소속 박동규 소방장(45) 등 6명이 숨졌다. 한꺼번에 6명이 숨지기는 처음이었다. 2008년 8월 서울 은평구 대조동의 한 나이트클럽 화재 진압에 나갔던 은평소방서 소속 조기현·김규재 소방장, 변재우 소방사가 갑자기 무너진 천장 구조물에 깔려 순직했다.
화재현장에서 연기에 질식해 숨지는 일도 다반사다.

1970년 4월 9일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동 4가 상아탑 지하다방에서 불이 났다. 연탄난로가 과열되면서 줄에 널었던 수건에 인화돼 일어난 화재다. 영등포소방서 박영서 소방사(32)는 14명을 구하고 연기에 질식해 숨졌다. 그는 1959년 12월 소방경찰이 된 후 700여회 출동했다.

발을 헛디뎌 죽고, 불연소 가스가 폭발해 죽는다. 분초를 다투며 출동하다 죽기도 한다.

1970년 영등포소방서 박영서 소방사의 살신성인 구조담을 전하는 기사. /경향신문 자료

1970년 영등포소방서 박영서 소방사의 살신성인 구조담을 전하는 기사. /경향신문 자료

지난 4일 낮 화재현장에 출동하다 소방차가 뒤집혀 순직한 서울 성동소방서 방호주임 고상묵씨는 근속 26년에 출동횟수 9000회의 기록을 가진 소방 ‘베테랑’. 일제 때부터 큰 화재는 거의 다 겪은 그는 “1만번 출동하고 물러나겠다”던 게 소원이었다.(1966년 8월 5일자, 불길 속에 보낸 일생)

1983년 같은 소방서 소속 우종섭 소방사도 화재현장에 출동하다 차량 충돌사고로 순직했다.

일반인들은 흥청거리는 명절이나 경축일, 연말연시에는 더욱 화재가 잦아 비상근무를 해야 한다. (중략) 소방관들은 자신들의 직업을 ‘창살 없는 감옥’에 비유하기도 한다. 이들의 공통된 특징은 하나같이 온몸이 상처투성이라는 점이다. 손등은 쭈글쭈글하고 굳은 살이 박혀 있는가 하면 얼굴과 목·팔다리 등이 화상으로 얼룩져 있다. (중략) 화재현장에서 입은 상처로 어깨 허리 무릎 등에 신경통을 앓기도 하고, 식사를 제때 하지 못해 위장이 약한 사람도 있으며, 연기를 많이 마셔 기관지가 약해지거나 시력이 나빠진 사람도 있다.(경향신문 1983년 6월 18일자, 재난 전선 지키는 안녕의 파수꾼들 소방관)

1983년 경향신문이 전한 소방관들의 상황은 지금도 그닥 나아지지 않았다. 소설가 김훈은 소방관들의 출동에서 “정부와 국가의 기능이 정확하고도 아름답게 작동되고 있다는 신뢰감을 느낀다”고 했지만, 소방관들에 대한 처우와 대우에선 국가와 정부의 기능이 작동하지 않거나 오작동한다. 소방관이 죽고 다쳐야 반짝 대책을 내놓을 뿐이다. 국가와 정부의 영역은 소방관들에게 또다른 재난현장이다. 1998년 경남 사천소방서 소속인 이정근씨는 경남 하동군 덕천강에서 물에 빠진 사람들을 구하다 급류에 휩쓸려 죽었다. 유족은 2000년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를 냈다. 소장에서 로프와 자일 등 원시적인 구조장비를 지적했다. 이들은 고위공직자들도 비판했다. “재해가 발생할 때마다 국무총리, 장관, 국회조사단, 여야 총재 등이 현지 방문을 하는 바람에 구조대원들은 바쁜 와중에도 도로 청소, 브리핑 자료 준비 등에 매달리고 있다.”

서울 대조동 나이트클럽 화재사고로 순직한 조기현, 김규재, 변재우 소방관의 유족들이 은평초등학교에서 열린 합동 영결식에서 통곡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

서울 대조동 나이트클럽 화재사고로 순직한 조기현, 김규재, 변재우 소방관의 유족들이 은평초등학교에서 열린 합동 영결식에서 통곡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

국립묘지 안장은 수십년된 숙원이었다. 소방관은 지방직 일반공무원이란 신분 때문에 국립묘지에 묻히지 못했다. 1994년에야 안장될 수 있었다. 하지만 군사정권의 하수인과 친일파들은 쉽게 가도, 소방관들은 웬만해선 가기 힘든 곳이다. 지난 7월 고양이를 구조하다 로프가 끊어져 추락사한 김종현 소방교의 국립묘지 안장은 아직 결정나지 않았다. 2001년 5월 서울 관악소방서 채희수 소방교가 봉변 여대생을 돕다 흉기에 맞아 숨졌다. 소방서 측은 공무원연금관리공단에 ‘순직’으로 인정해 달라며 유족보상금 지급을 신청했지만, 공단은 규정을 이유로 거부했다.

2000년대 들어 소방관들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문제가 나왔다. 일부 지자체가 부분적으로 진단을 하고 있지만, 국가적이고 근본적인 대책은 없다. 지난 5월 전남지역에서 3명이 잇달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들은 우울증을 앓았다. 2001년 3월 소방관 6명이 숨진 홍제동 화재사고 때 작전에 나갔던 동료 한 명은 그 당시 상황을 기억 못했다.

<김종목 경향신문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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