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상고 출신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7월 20일 서울 중구 을지로 기업은행 본사를 방문해 특성화고 출신의 신입 은행원들을 격려했다. 이 대통령은 “제 나이 때 뭘 하셨나요”라는 한 신입 행원의 질문에 본인도 야간 상고를 다녔다며 “낮에는 돈 벌고 밤에 공부했던” 시절을 회상했다.
은행권에 고졸 행원 채용 바람이 불고 있다. 은행연합회는 지난 7월 21일 18개 국내 은행이 올해(상반기 포함)부터 2013년까지 3년간 고졸인력을 2700명 이상 뽑을 계획이라고 밝혔다. 최근 고졸 채용 바람이 강하게 불자 각 은행들로부터 채용계획을 제출받아 전체적인 수치를 발표한 것이다. 이날 발표된 채용규모는 향후 3년간 은행권이 채용할 전체 인원의 12% 수준이다.
앞으로 3년간 은행에 취업하게 될 2700명은 대부분 창구 텔러 직군이다. 창구직원은 외환위기 이전까지만 해도 서울여상 등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명문 여상 출신들이 졸업한 뒤 직행하는 일자리였다.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고졸 행원들은 은행 창구에서 점차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대졸자들이 넘쳐나면서 오랜 기간 고졸 행원의 몫이었던 창구 텔러 직군까지 대졸자들이 차지해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졸 채용 바람이 불면서 이들이 다시금 은행 각 지점의 창구로 돌아올 수 있는 길이 열리고 있다.
고졸 채용에 불을 댕긴 것은 기업은행이다. 기업은행은 지난 6월 특성화고 출신 20명을 창구직원으로 채용했다. 기업은행이 상반기에 고졸 출신을 채용한다는 계획이 전해졌을 때 정치권 등 각계에서 좋은 반응이 나왔다. 조준희 기업은행장은 6월 국회 정무위원회 의원들로부터 “참신하다”는 호평을 듣기도 했다. 자유선진당은 논평을 내고 “기업은행이 15년 만에 고교 졸업생 20명을 신입행원으로 한꺼번에 채용했다”며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취업난이 심해지면서 사실상 은행 취업은 대졸자에게도 넘기 힘든 고시 수준에 육박하는 높은 벽이었다.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학벌 중심사회에서 오랜만에 듣는 기쁜 소식”이라고 밝혔다.
기업은행 관계자는 “지난해 12월 서울여상에서 2명의 졸업생을 선발했는데 영업점의 평가가 매우 좋았다”며 채용을 확대하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기업은행은 고졸 행원 채용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커지자 하반기에도 신입 창구 텔러 채용인원 120명 중 40명 정도를 특성화고 재학생 중에서 뽑을 예정이다.
산업은행도 지난 7월 18일 기자간담회를 열고 150명 내외의 하반기 공개채용 때 특성화고 등 고졸과 지방대 출신을 각각 50명씩 뽑을 계획이라고 밝혔다. 산업은행이 고졸 행원을 채용하는 것은 15년 만이다. 산업은행 김영기 부행장은 “민영화에 대비, 수신기반을 확충해야 하기 때문에 점포 신설 등에 소요되는 고졸 인력을 충원하겠다”며 “향후 인력수요, 특성화고 졸업생의 인적 역량 등을 고려해 장기적으로 산업은행 전체 채용인력의 50% 내외로 확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정세균 민주당 최고위원은 지난 7월 20일 영등포 당사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산업은행의 이 같은 행보에 대해 환영의 뜻을 내비쳤다. 정 위원은 “이명박 정권 임기 내에 강만수씨에게 박수를 보낼 일이 있겠냐고 했는데, 이번에 강만수씨가 이끌고 있는 산업은행이 고졸 출신을 50명 뽑기로 한 결정에 대해 진심으로 환영하고 박수를 보낸다”고 말했다.
물론 은행들이 이전에 고졸 행원을 전혀 뽑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지난 2년간 연평균 459명의 고졸 행원을 뽑았다. 하지만 앞으로 3년 동안 연평균 907명을 뽑을 계획인 점을 감안하면 이전보다 2배 가까이 채용규모를 확대하는 것이다. 왜 갑자기 은행들이 일정한 할당량(쿼터)을 배정하는 방식으로 고졸 행원에게 취업문을 열어주고 있는 것일까.
일단 고졸 채용 인원을 대폭 확충한다는 계획을 잇달아 발표한 곳이 금융 공기업인 기업은행, 산업은행 등이라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상대적으로 정부의 입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은행들이 ‘학력 인플레이션, 고졸 실업 해소’라는 정부의 정책 방향에 코드를 맞춘 측면도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산업은행 관계자는 “이번 채용계획은 ‘취업과 학업의 병행을 통한 성장동력 확충’ 등 정부 정책에 부응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산업은행이 기자간담회에서 배포한 자료를 보면 은행·보험 등 국내 금융회사 일선창구에서 근무하는 직원 가운데 고졸 사원의 비중은 한국이 34%로, 미국(83%)보다 굉장히 낮다. 교육과학기술부에 따르면 지난해 고등학생 10명 중 8명이 대학에 진학했다. 전문계고 학생의 대학 진학률도 71.1%에 이르렀다. 반면 2008년 기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평균 대학 진학률은 56%였다. 수치상으로만 봐도 학력 인플레가 심각해 고졸 출신이 상대적으로 좋은 일자리에서 밀려나고 있다는 점이 확인되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고졸 행원 채용 확대는 은행이 학력 인플레 해소를 유도하기 위해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있다는 이미지를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최근 은행들이 가계대출을 통한 이자수익 등으로 쉽게 돈을 번다는 보도들이 많았는데 이 같은 이미지를 불식시키려는 의도도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금융 공기업들이 ‘선수’를 치고 난 뒤 각계에서 좋은 반응이 쏟아지고 있고, 여기에 이 대통령까지 고졸 행원을 격려하기 위해 기업은행을 방문한 마당에 이 흐름에서 한 발 물러서려는 은행이 나오긴 어렵다. 향후 3년간 2700명이라는 채용규모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이를 형성해준 측면도 크다.
하지만 채용하는 고졸 행원의 수도 중요하지만 고용의 질도 함께 짚어봐야 한다는 목소리들이 나오고 있다. 앞으로 채용될 고졸 행원들은 대부분 2년 계약직인 창구직원으로 선발되기 때문이다. 이들은 취업 초기에 고용이 불안정한 상황을 겪을 수밖에 없다. 물론 2년 뒤 업무태도, 성과 등에 따라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되더라도 고용은 보장되지만, 일반 대졸 정규직과 비교할 때 임금·승진체계 등에서 차등 대우를 받는다. 은행들은 고졸 행원이 창구직원, 콜센터 상담원 등 단순업무에 한정되지 않도록 정규직 전환을 확대해나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 노력이 말로만 그친다면 ‘고졸 여성은 창구직원, 대졸 남성은 일반 정규직’이라는 이중구조가 은행 내에서 고착화될 수도 있다.
<김지환 경향신문 경제부 기자 baldkim@kha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