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체계는 어떻게 진화해 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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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로버트L. 하일브로너, 윌리엄 밀버그 지음·홍기빈 옮김·미지북스·1만8000원

<자본주의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로버트L. 하일브로너, 윌리엄 밀버그 지음·홍기빈 옮김·미지북스·1만8000원

지난 2005년 사망한 로버트 L. 하일브로너는 대중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경제학자 중 한 명이다. 그가 쓴 20권의 저서들은 전 세계적으로 1000만권 이상 팔렸는데, 그 중에서도 그를 베스트셀러 저자의 반열에 단숨에 올려놓은 책이 이번에 출간된 <자본주의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와 한국에서도 크게 인기를 모았던 <세속의 철학자들>이다.

<자본주의 어디서…>의 초판이 나온 것은 1963년이다. 그보다 10년 전 출간된 <세속의 철학자들>로 명성을 얻었지만 10년 동안 박사학위를 얻지 못했던 하일브로너는 이 책의 원고를 제출하면서 비로소 박사학위를 받았다. 

초판 출간연도만 보고 이 책이 먼지 쌓인 고전일 것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자본주의의 역사를 다룬 이 책은 초판 이후 지금까지 11차례 개정판을 냈다. 판을 거듭할수록 새로운 내용이 추가되면서 초판과 비교해 내용이 절반 이상 달라졌다. 최신판인 12판(2007년 출간)은 2000년대 이후 미국의 신경제와 금융세계화까지를 다루고 있다. 이번에 출간된 한국어판은 이 12판을 번역한 것이다.

책의 목적은 분명하다. “전통과 권위가 지배하던 과거의 사회들로부터 어떻게 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시장 체제가 진화하여 나왔는가를 되돌아보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위해 사회가 경제문제를 해결해온 방식의 변화를 고대로부터 중세를 거쳐 현대에 이르는 장구한 시간적 스펙트럼 아래서 살핀다.

자본주의 체제 형성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시장이 경제에서 차지하는 역할의 극적 변화다. 물건과 화폐가 오고가는 시장은 고대 사회에도 존재했다. 그러나 시장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힘은 아니었다. 중세 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재화의 생산과 분배는 시장이 아닌 관습과 권력자의 명령을 통해 이뤄졌다. 중세 시대에 이윤 추구가 종교적 죄악으로까지 간주됐다는 점을 고려하면, 시장 자본주의 이전과 이후 일어난 세계관의 변화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크다.

저자는 경제를 세상사의 다른 부분들로부터 뚝 떨어져 있는 영역으로 보지 않는다. 이는 기존의 경제학 책들과 이 책이 가장 확연하게 구분되는 지점이다. 경제문제를 통계나 수학 모형으로 파악하는 주류 경제학의 저술들과 달리, 하일브로너는 “자본주의 사회를 추동하는 사회적, 심리적, 도덕적 힘들의 풍성한 지평”을 모두 살핀다. 이런 태도를 바탕에 깔고 있는 저자는 ‘정부의 역할은 무엇인가’ ‘경제 발전은 건강한 자연환경도 함께 생산할 수 있는가’ ‘세계적 빈곤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경제적 지구화는 국제분쟁을 줄이는 데 기여하는가 악화시키는가’ 같은, 주류 경제학자들은 고민하지 않는 물음들을 책 곳곳에서 던진다. “경제적 변화를 이해하려면 경제가 묻어 들어 있는 사회적, 도덕적 맥락을 의식할 필요가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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