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시중의 패왕지보와 결자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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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장악 의혹’ 풀려면 사퇴해야

최시중 방통위원장(왼쪽 세번째) 등이 방통위 현판식을 한 뒤 손뼉을 치고 있다. <정지윤 기자>

최시중 방통위원장(왼쪽 세번째) 등이 방통위 현판식을 한 뒤 손뼉을 치고 있다. <정지윤 기자>

오는 6월 임시국회에서 결판날 것으로 전망되는 미디어관련법은 정국의 ‘뜨거운 감자’에 해당한다. 신문사의 방송 겸영 등을 ‘언론 장악 음모’로 파악하고 있는 전국언론노동조합과 MBC 등이 파업 불사를 외치며 강력 반발하고 있는 게 그 증거다. 여기에는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에 대한 깊은 불신이 깔려 있다.

이 대통령 정치입문 후 정신적 멘토
여권에서는 그를 자타가 공인하는 ‘이명박 대통령의 멘토’로 보고 있다. 그리스의 오디세이 왕이 트로이전쟁에 출전하면서 사랑하는 아들을 친구인 멘토르(mentor)에게 맡긴 데서 나온 이 말은 지혜와 믿음으로 인생을 이끌어주는 조언자나 후견인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그가 이 대통령의 멘토가 된 데는 유력 일간지의 데스크와 한국갤럽 회장을 지내면서 현실 정치의 흐름을 정밀하게 탐색해온 전력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멘토는 크게 왕사(王師)와 책사(策士)로 나눌 수 있다. 사서에 등장하는 최초의 왕사는 주나라 건국공신인 여상(呂尙)이다. <사기>에 따르면 여상은 나이가 70에 이르도록 지우(知遇)를 만나지 못해 매일 위수(渭水) 강가로 나가 미끼를 끼우지 않은 채 세월을 낚았다. 지우의 은혜를 베풀 주군이 나타나기를 기다린 것이다. 하루는 주문왕이 꿈속에서 현인을 본 후 그를 찾기 위해 널리 수소문했으나 실패했다. 점복을 관장하는 태사(太史)를 불러 점을 치게 하자 이런 점괘가 나왔다.
“사냥할 것은 용과 이무기도 아닌 패왕지보(覇王之輔·패왕의 보필, 왕사를 지칭)이다.”

태사의 말을 좇아 위수 부근으로 사냥을 나간 그는 위수의 지류인 반계(磻溪)에서 낚시를 하는 여상을 만났다. 여상과 얘기를 나눈 그는 크게 기뻐하며 이같이 말했다.

“태공(太公·주문왕의 선조) 때부터 이르기를, ‘장차 성인이 주나라에 올 것이니 주나라는 그로 인해 일어날 것이다’라고 했소. 선생이 진정 그분이 아니오. 우리 태공이 선생을 기다린 지 오래되었소.”

이에 그를 ‘태공망(太公望·태공이 바라던 인물)’이라고 칭하면서 수레를 함께 타고 돌아온 뒤 왕사로 모셨다. 왕사나 제사(帝師)는 주로 국가 대사에 관한 자문에 응하는 까닭에 국사(國師)로 불리기도 한다. 삼국시대 제갈량도 이에 해당한다. 일각에서는 제갈량이 유비를 직접 찾아가 ‘천하삼분지계’를 헌의했다는 <위략>의 기록을 근거로 왕사보다 책사에 가깝다고 보고 있으나 유비가 삼고초려(三顧草廬)를 했다는 게 중설이다. 원래 왕사와 책사는 엄밀히 구분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조선조의 하륜과 한명회가 태종과 세조로부터 스승에 준하는 벗인 사우(師友)의 예우를 받은 게 그 증거다. 왕사와 책사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 결과였다.

난세의 시기에는 군웅이 일시에 굴기하는 까닭에 책사가 우후죽순처럼 나타나게 마련이다. 뛰어난 책사의 다과에 군웅의 운명이 좌우되었다. 초한전 때 항우와 유방 역시 각각 범증(范增)과 장량(張良)이라는 당대의 책사를 두고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쟁웅(爭雄)을 전개한 바 있다. 유방이 기습적으로 함양을 점령하자 총사령관 격인 항우는 그를 책망하기 위해 홍문(鴻門·섬서성 소재 음반성의 동쪽 문)에 주연을 베푼 뒤 그를 불렀다. 범증의 계책을 좇아 유방의 목을 쳤으면 천하의 주인은 곧바로 가려질 수 있었으나 우유부단한 항우는 이를 결행하지 못했다.

당시 유방은 장량의 계책을 좇아 간신히 호구(虎口)를 빠져나오면서 장량에게 백벽(白璧·백옥구슬)과 옥두(玉斗)를 각각 항우와 범증에게 바치도록 했다. 유방이 군영에 이르렀다고 생각될 즈음 장량이 장막 안으로 들어가 항우에게 사과했다.

“패공(沛公·유방)이 술을 이기지 못해 작별인사를 올리지 못했습니다. 이에 저에게 백벽과 옥두를 각각 장군과 아부(亞父·범증)에게 바치게 했습니다.”

‘아부’는 당시 항우가 범증을 ‘부친에 필적하는 인물’로 높여 부른 데서 나온 존칭이다. ‘부(父)’는 남자의 미칭으로 쓰일 때는 ‘보(甫)’로 읽으나 부친에 준하는 존경스러운 인물이나 나이 많은 남자를 지칭할 때는 ‘부’로 읽는다. 항우가 물었다.
“패공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장군이 책망하려 한다는 얘기를 듣고 황송하여 속히 몸을 빼내 홀로 떠났습니다.”
항우가 흡족해하며 백벽을 받아들이자 범증은 옥두를 땅에 대던진 뒤 칼을 뽑아 이를 내리치며 이같이 탄식했다. “아, 수자(어린 아이)와는 족히 더불어 천하대사를 계모(計謀)할 수 없구나. 장차 그의 천하를 빼앗는 자는 반드시 패공일 것이다. 나 또한 그의 포로가 되고 말 것이다.”

범증과 달리 당시 주군을 잘 만난 장량은 마침내 자신이 뜻하는 바를 이룰 수 있었다. 이 대통령의 정계 입문 이후 시종 정치적 멘토 역할을 해온 최 위원장 역시 이 대통령이 서울시장에 당선하자 곧바로 대붕도남(大鵬圖南)의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5년 만에 이를 완성했다. 이 대통령이 당내 경선에서 박근혜 후보와 치열한 접전을 벌인 끝에 여론조사에서 이겨 마침내 청와대에 입성하게 된 데는 그의 공이 컸다.

당시 그는 공식석 상에는 전혀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채 이상득 의원 등이 참석하는 소위 ‘6인 회의’를 주도하며 외부 사무실에서 여론조사팀을 총지휘했다. 이 후보 측이 제시한 여론조사 방안을 무책임하게 수용한 박 후보 측은 범증과 같은 책사가 없었거나 박 후보 자신이 홍문에서 범한 항우의 전철을 밟은 것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야전사령관 퇴진시킨 막후실력자
그러나 그는 이로 인해 장량에 필적하는 대공을 세우게 되었다. 그 또한 스스로 그런 인물로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지난해 4월의 <신동아> 별책부록에 수록된 인터뷰가 그 증거다.

“물이 넘치려고 할 때 제방이 돼주는 것이 내 임무다. 지금까지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의 향우 역할과 위상을 짐작케 해주는 대목이다. 실제로 그는 또 다른 일등공신인 이재오 전 최고위원이 박 의원 진영과 갈등으로 물의를 빚자 “최고위원 자리에서 물러나는 게 좋겠다”며 이를 관철시킨 바 있다. 막후와 야전에서 대공을 세운 두 공신에 대한 신임의 순위가 명확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여권에서 그를 두고 ‘측근 중의 측근’으로 칭하는 게 결코 허언이 아님을 입증한 셈이다.

최근 그가 방통위원장의 자격으로 전방부대를 시찰하며 장병들에게 철통 안보를 당부하는 등 상국(相國)과 맞먹는 ‘패왕지보’의 행보를 보이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이 대통령과 같은 경북 영일 출신으로, ‘만사형통(萬事兄通)’의 당사자인 이상득 의원과는 서울대 57학번의 막역지우기도 하다. 여러모로 최측근으로 불릴 만한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는 셈이다.

히틀러의 오른팔 ‘괴벨스’에 비유
그러나 그의 이런 행보에 대한 언론단체와 야권의 시선은 극히 차갑다. 히틀러의 오른팔로 활약한 선전선동술의 대가 ‘괴벨스’에 비유하고 있는 현실이 그렇다. 공교롭게도 그 역시 누차 여론지지율 상승의 비책을 건의해 이를 적중시킨 바 있다. 대붕도남의 밑그림을 그릴 때 이미 정동영 전 의원이 적장이 될 것을 예견하며 필승지책을 제시한 것은 그의 ‘괴벨스’ 안목이 어떤 수준이었는지 웅변하고 있다.

“정 전 의원은 인물과 언변, 나이 등 모든 면에서 당신보다 유리하다. 그를 이기려면 일로써 성과를 보여주는 수밖에 없다.”
‘청계천 신화’가 만들어진 배경이 그것이다. 일찍이 괴벨스는 선전선동술의 요체로 ‘거짓말 신화’를 들면서 “거짓말도 반복하면 진실이 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대중은 거짓말을 들었을 때 처음엔 부정하고, 두 번째는 의심하고, 세 번째 이후에는 점차 진실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효자로 소문난 증자의 모친이 자식이 살인했다는 이웃사람의 얘기를 3번 듣고는 동명이인의 사람이 저지른 일인 줄도 모르고 이내 베를 짜던 북을 내던지고 담을 넘어 달아났다는 고사를 연상시키는 금언이다.

공교롭게도 그 역시 여론조사 조작 혐의로 구설에 오른 바 있다. 경선 때 이 후보의 상임고문에 임명되자 박 후보 측이 발끈하며 곧바로 그의 사임을 촉구하고 나선 게 그것이다. 박 후보의 여론 지지율이 상대적으로 낮게 나온 한국갤럽의 여론조사 배경에 강한 의혹을 제기한 것이다. 민주당 등이 ‘방송 장악 음모’의 주범으로 그를 지목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에 대해 그는 이같이 해명한 바 있다.

“나는 그간 독립성과 객관성, 중립성을 생명으로 하는 언론인과 여론조사위원의 삶을 살아왔다. 어찌 보면 이 대통령이 당선하는 데 모든 것을 걸었다고 할 수 있으나 그렇다고 향후 방송통신위원회를 편파적으로 운영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 YTN이 이 후보의 언론특보 출신인 구본홍 사장의 취임 파문으로 급기야 파업사태로 치닫게 된 것은 어떻게 해명할 수 있는 것일까. 참여정부 출범 당시 노무현 후보의 언론특보 출신인 서동구씨가 KBS사장에 임명되었다가 이내 하차한 것과 대비되는 대목이다. 당시 한나라당은 “측근을 보내 공영방송을 좌지우지하려는 속내를 드러냈다”며 강력 성토한 바 있다. 대략 공영방송이 친여매체로 전락할 경우 ‘권토중래’의 가능성이 영영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위기감이 크게 작용했음직하다. 민주당이 극한투쟁을 전개한 심경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한나라당이 주장했듯이 ‘대통령이 아니라 국민과 정서가 맞고 전문성과 도덕성을 갖추고 있으면서 방송 중립을 지킬 수 있는 인물’로 교체하는 게 정도다. 이는 ‘패왕지보’인 그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다. 그게 만단(萬端)의 장본인이 취할 수 있는 결자해지(結者解之)의 해법이기도 하다.

신동준<21세기정경연구소장> xhindj@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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