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기갑 의원의 공중부양과 위정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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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 외면한 ‘도덕적 자만심’은 위험

민노당 강기갑 대표가 쌀직불금을 수령한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의회 의원 명단을 공개하고 있다. <김정근 기자>

민노당 강기갑 대표가 쌀직불금을 수령한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의회 의원 명단을 공개하고 있다. <김정근 기자>

민주노동당의 사령탑인 강기갑 의원은 신년 벽두에 한복을 입은 채 국회 사무총장실 원탁 위로 뛰어올라 무협지에서나 볼 수 있는 ‘공중부양’을 시전(施展)했다. 당시 그의 ‘한복 공중부양’을 신이(神異)하게 여긴 외신은 이를 대서특필해 전 세계에 긴급 타전했다. 국회 경위들의 폭압적인 행동에 순간적으로 격앙되었다는 변명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지라도 국격(國格)을 훼손하는 데 일조했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게 되었다.

쌀 개방 저지 ‘멕시코 무용담’ 남겨
그러나 그가 대국민사과에서 “국민에게 실망을 준 것이 저의 다친 손가락보다 더 큰 통증으로 다가왔다”며 회한(悔恨)을 토로했다. 이번 사태에서 가장 돋보인 정치인을 꼽으라는 여론조사 설문에 그가 한나라당의 박근혜 의원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점수를 받은 사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물론 이것이 그의 폭력행위에 대한 면책을 뜻하는 것이 아님은 말할 것도 없다.

원래 한복은 칼을 찰 수 있도록 배려한 일본의 와후쿠(和服·기모노)와 달리 붓과 책 등을 소매 안에 넣을 수 있도록 품을 넓게 만든 까닭에 무위(武威)와는 거리가 멀다. 그는 왜 문화(文華)의 상징인 한복을 고집하면서 ‘한복 공중부양’의 무위를 선보인 것일까.

당초 그는 1971년에 사천농고를 졸업한 뒤 공무원이 될 것을 바라는 부형의 권유를 뿌리치고 젖소와 과수를 기르는 농민지도자의 길을 선택했다. 이후 가톨릭농민회에 가입해 농민운동가로 변신한 그는 도중에 동향 출신 신부의 영향을 받아 수도자가 되고자 했다가 1987년에 이내 귀향한 뒤 ‘농촌총각결혼대책위’를 만들었다. 10여 년 동안 모두 120여 쌍을 결혼시키는 성과를 올리는 활약을 했고 그 역시 대열에 합류해 총각 신세를 면할 수 있었다.

이후 그의 농민운동 행보는 속도를 더했다. 2003년에 멕시코 칸쿤의 WTO 각료회의장 앞에서 쌀 개방 저지운동을 주도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멕시코 당국은 세계 각국의 농민들이 몰려들자 회의장 주변에 바리케이드를 여러 겹 설치해 이들의 접근을 막았다. 시위대가 망연자실해 있을 때 그가 어디서 구해 왔는지 밧줄을 들고 나타나 바리케이드 한쪽 끝을 단단히 묶고 잡아당겼다. 이내 바리케이드가 모두 무너지고 말았다. 칸쿤의 일화는 농민들 사이에서 ‘라만차의 풍차’를 향해 돌진한 한국판 돈키호테의 무용담으로 남게 되었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국민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시킨 결정적 계기는 18대 총선이다. 상대는 이명박 대통령의 최측근인 한나라당의 이방호 사무총장으로 당시 강 의원의 승리를 점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론조사는 물론 투표 당일의 TV 출구조사에서조차 큰 표 차이로 패배하는 것으로 나타났으나 그는 끝내 예상을 뒤엎고 178표차로 승리하는 기적을 일궈냈다. 여기에는 ‘소지역주의’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선거 양상이 ‘오만 대 겸손’의 대결로 전개되면서 그의 우직하면서도 겸손한 행보가 유권자들의 마음을 움직인 게 결정적인 승인이었다.

이를 방증하는 사례가 있다. 하루는 그가 딸기하우스와 묘목농사를 하는 농민들과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 우분(牛糞)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등원 이후에도 ‘농민의원’의 기본 자세를 잃지 않기 위해 밤나무와 단감 농사를 지으면서 젖소 90마리를 치던 그가 즉석에서 약속했다.

“우리 집에 우분이 많으니 곧 갖다 드리겠습니다.”
며칠 후 과연 우분을 가득 실은 덤프트럭이 왔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한 번 한 약속은 기필코 지키는 사람이라는 소문이 널리 퍼져나갔다. 이는 전국시대 초기에 명성을 떨친 위문후(魏文侯)의 고사를 연상케 한다.
하루는 위문후가 우인(虞人·산택을 관장하는 관원)과 사냥할 기일을 잡게 되었다. 마침 사냥 당일에 주연을 즐기던 중 문득 비가 내리자 위문후가 좌우에 물었다.
“오시(午時)가 되려면 아직 멀었는가.”
“지금이 바로 오시입니다.”
위문후가 곧 좌우에 분부했다.
“술상을 치우고 수레를 준비토록 하라. 곧 교외로 나가야겠다.”
신하들이 만류했다.
“주연이 한창인 데다가 비까지 오는데 어디로 가려는 것입니까.”
위문후가 말했다.
“과인은 이미 우인과 사냥 약속을 하여 이제 약속한 시각이 되었소. 아무리 주연이 즐거운들 어찌 약속시간을 조금이라도 어길 수 있겠소.”
그러고는 비를 맞으며 교외로 수레를 몰았다. 이 얘기를 전해들은 백성들이 입을 모아 칭송했다.
“우리 군주는 저토록 신의를 지킨다.”

한·미 FTA 시종일관 결사반대
그의 ‘한복 공중부양’을 두고 적잖은 사람이 폭거(暴擧)로 매도하고 있음에도 그의 평소 행보를 알고 있는 주변 사람들은 오히려 의거(義擧)로 평가하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MB법안’에 대한 여야의 평가가 ‘선법(善法)’과 ‘악법(惡法)’으로 엇갈리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당부(當否)를 논하는 정치의 세계가 선악(善惡)의 잣대가 적용되는 도덕의 세계로 함몰된 후과가 아닐 수 없다.

강기갑 의원이 1월 5일 박계동 국회사무총장에게 국회 경위들이 로덴터홀에서 농성 중인 민노당 당직자들을 끌어낸 데 대해 항의하며 총장실 탁자 위에 올라가서 발을 구르고 있다. <서성일 기자>

강기갑 의원이 1월 5일 박계동 국회사무총장에게 국회 경위들이 로덴터홀에서 농성 중인 민노당 당직자들을 끌어낸 데 대해 항의하며 총장실 탁자 위에 올라가서 발을 구르고 있다. <서성일 기자>

원래 수출을 통해 먹고살아야 하는 우리에게 한·미 FTA 등은 선악의 차원에서 접근할 사안이 아니다. 그럼에도 강 의원은 시종 결사반대로 일관하고 있다. 이는 과거 김영삼 전 대통령이 보여준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결사반대 행보와 사뭇 닮아 있다. 최근 흥사단에서 열린 ‘올바른 사람들’의 발족 모임에 찬조연사로 나선 이만섭 전 국회의장의 증언. 당시 야당인 신민당은 국회의사당 본회의장에서 농성을 주도하며 이를 결사저지하고 나섰다. 공화당의 수석부총무로 있던 이 전 의장이 야당의 수석부총무로 있던 김 전 대통령에게 그 이유를 묻자 이런 반문이 돌아왔다.

“공화당이 또다시 고속도로 건설을 구실로 정치자금을 뽑아내려는 수작이 아니오.”
공화당이 창당 과정에서 증권 파동 등의 비리를 저지른 전례에 비춰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반문이기는 했으나 대국을 읽지 못했다는 지적을 면하기 어렵다. 모든 사안을 ‘민주화’의 잣대로 접근한 결과였다. 강 의원도 1979년에 문득 라디오를 통해 박 전 대통령의 사망 소식을 듣고 밥숟가락을 내던지며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농민운동을 통한 민주화운동에 매진한 결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MB법안’은 명분론의 ‘민주화’보다는 실리론의 ‘선진화’ 차원에서 접근해야 할 사안에 해당한다.

최근 북한의 전면대결 태세 선언과 관련해 강 의원이 향후 ‘6·15 공동선언’과 ‘10·4 공동선언’의 이행운동 계기로 삼겠다고 밝힌 것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정부에 대해 비현실적인 ‘비핵개방 3000’ 정책의 포기와 시의에 부합하는 정책 전환을 촉구한 것은 시의에 부합한다.

지난 13대 국회 당시 가톨릭농민회장 출신인 서경원 전 의원도 김대중 평민당 총재의 발탁으로 정계에 입문한 뒤 시종 한복을 입은 채 활발한 의정활동을 펼친 바 있다. 그러나 그는 1988년 8월에 은밀히 방북해 김일성 주석과 면담한 뒤 농민운동지원금 명목으로 5만 달러를 받은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국민들을 경악케 만들었다. 자신만의 ‘자주통일운동’을 전개한 후과였다.

일찍이 구한말의 이항로와 최익현 등의 위정척사파(衛正斥邪派)도 유사한 우를 범했다. 당시 이들은 김옥균 등의 개화파와는 정반대로 조선을 비롯한 동양을 ‘문명’, 일본과 서양을 ‘야만’으로 규정한 뒤 강력한 반개화운동을 전개했다. 이는 패도(覇道)에 입각한 이적(夷狄)의 문물을 물리쳐야 한다는 성리학의 존왕양이(尊王攘夷)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존왕양이 사상은 설령 난세에 처할지라도 덕치를 토대로 한 왕도(王道)로 치평(治平)에 임해야 한다는 게 골자다. 당시 위정척사파는 명제국의 패망 이후 조선만이 유일하게 ‘왕도’를 지키고 있는 까닭에 무력을 앞세운 양이의 ‘패도’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를 전개했다.

수권정당으로‘유연한 행보’ 필요
그러나 이는 장차 나라를 통째로 열강에 넘겨주겠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국가 간의 힘이 정면충돌하는 난세에는 ‘문(文)’이 아닌 ‘무(武)’를 앞세워야 한다. 공자가 말한 존왕양이의 본래 취지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공자는 결코 난세에도 ‘문’을 ‘무’보다 앞세워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없다. 위정척사파의 주장은 일본의 대표적인 존왕양이론자인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이 “양이의 침공을 막기 위해서라도 양이의 과학기술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 것과 대조되는 것이었다.

조선의 위정척사파는 ‘왕도’라는 공허한 도덕이념에 함몰된 나머지 명분과 실리의 접점을 찾지 못한 채 나라의 패망을 재촉했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식민지쟁탈전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제국주의 상황에서 ‘왕도’로 왜양(倭洋)을 모두 굴복시킬 수 있다는 망상에 빠진 결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난세에 근거 없는 도덕적 자만심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훗날 이들 위정척사파가 친일파로 전향한 대다수 개화파와 달리 치열한 의병활동을 전개한 것은 그것대로 평가할지라도 이들에게 망국 책임의 일단을 엄중히 묻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위정척사파와 유사한 행보를 보이고 있는 강 의원도 이를 사감(史鑑)으로 삼아 면모일신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공허한 대북정책의 수정을 촉구하면서도 정부 여당과 머리를 맞대고 통일의 대강(大綱)을 마련하는 유연한 행보가 필요한 것이다. 민노당이 영국의 노동당 및 프랑스의 사회당과 같은 수권정당으로 변신할 수 있다면 그 비책이 여기에 있다.

신동준<21세기정경연구소장> xhindj@hanmail.net

신동준 | 21세기정경연구소장. <조선일보> <한겨레> 기자. 도쿄대 동양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 서울대·외국어대·국민대 강사. <자치통감-삼국지> <국어> <공자와 천하를 논하다> <연산군을 위한 변명> 등의 저·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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