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땅걷기’ 신정일 이사장은 1980년대 중반부터 문화유산답사를 하며 전국을 떠돌았고, 남한의 8대 강을 따라 걸었으며, 한국의 산 400여 곳을 올랐다. 그렇게 돌아다니면서 찾은 명당 33곳을 ‘대한민국에서 살기 좋은 곳 33’이라는 책에 담았다. 신 이사장이 소개한 33곳 중 아름다운 자연과 화합하며 은퇴 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10곳을 소개한다. <편집자 주>
1. 전북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미륵 신앙의 본고장으로 새로운 세상을 꿈꾼 곳’
청도리에서 금구면 선암이로 넘어가는 고개가 살푸령재라고 부르는 싸리재다. 청도리 북쪽 전주로 넘어가는 길목에는 유각(有角)마을이 자리 잡고 있고, 하운동 북쪽의 터는 옛날에 말을 매던 곳이라는 마룻등이 있다. 미륵 신앙의 본고장이자 동학의 본산이며, 화엄적 후천개벽을 꿈꾸었던 강증산과 차경석의 텃밭이 바로 청도리다. 그들이 이곳에 터를 잡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다는 사실이 결코 우연일 수는 없을 것이다. 청도리는 가끔씩 찾아가면 가슴이 훈훈해지고, 문득 오랜 기억 속의 이들이 못 견디게 그리워지게 만드는 땅이다. 청도리 어느 곳이건 머물면서 귀신사 일대를 거닐며 한가함을 누리고 산다면 얼마나 마음이 풍요로울까. 명당이란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몸을 건강하게 만들어주는 땅일 것이다.
2.경북 성주군 월항면 대산동의 한개마을
‘왕실의 태실이 있는 명당 중 명당’
한개마을은 성산 이씨 집안이 터를 잡고 살아온 집성촌이다. 이 마을에는 기름진 땅이 펼쳐져 있고, 이천이라는 큰 내가 흐르고 있어 사람이 살기 좋은 땅의 입지 조건을 거의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 그리고 마을 앞에 서면 높이 331.7m의 영취산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이 산의 품에 포옥 안긴 듯해서 한개마을은 더욱 포근하게 느껴진다. 한개마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월항면 인론리의 서진산에는 세종대왕 왕자태실이 있다. 그 앞의 태봉은 서진산의 한쪽 자락이 빙 돌아 감싼 양지바른 봉우리인데 풍수지리학상 명당 터로 알려져 조선의 성군으로 추앙받는 세종대왕의 왕자들 태와 단종의 태가 모셔졌다. 전국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태실 가운데 가장 많은 태가 모여 있는 태봉은 장방형으로 평평하게 다듬어진 봉우리 꼭대기에 앞줄 11기, 뒷줄 8기 등 모두 19기의 태비가 두 줄로 길게 세워져 있다. 이곳은 주변의 골짜기와 개울들이 절경을 이루는 곳이 많아 사시사철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나라 안의 여느 민속마을처럼 드러내놓고 자랑할 만한 문화재로 지정된 건물은 많지 않지만 옛 멋을 그대로 간직한 채 한가롭고 포근함을 주는 곳이 한개마을이다.
3.경북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
‘낙동강 물길이 휘감아도는 아름다운 땅’
퇴계 이황이 강가에 늘어선 소나무를 보고 ‘참으로 아름답다’라고 했던 것에서 ‘가송’(佳松)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낙동강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가사리가 있고, 서쪽에는 쏘두들마을이 위치한다. 청량산을 내려와 도산서원을 거친 뒤 육사 시비를 지나는 길이 강을 따라 이어진다. 후세 사람들은 이 길을 퇴계오솔길이라고 부른다. 퇴계오솔길을 따라 걷다가 산길을 돌아가고 백운지교를 건너면 단사마을에 이른다. 논과 밭의 흙들에 유난히 붉은 빛깔의 모래가 많아 마을 이름을 ‘단사’(丹砂)라고 지었다. 이 마을은 예로부터 살기 좋은 곳으로 이름이 나 1970년대까지도 100여 가구가 살았다. 하지만 지금은 50여 가구만 남아 있다. 퇴계 이황의 자취가 짙게 배어 있는 가송리 일대는 눈길 던지는 곳마다 자리 잡고 있는 절경이 더없이 풍요로운 곳이다. 후학에게 가르침을 베풀고 강을 벗삼아 걸음을 옮겼을 퇴계의 흔적을 더듬으며 흐르는 강물에 세상의 걱정과 근심을 띄워 보내면 삶이 조금 더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4.전북 순창군 동계면 구미리
‘자연이 빚은 명당 중 명당’
섬진강의 시인 김용택의 고향 마을인 덕치면 장산리 진메마을을 지나 천담, 구담을 거쳐 강물이 휘돌아가는 회룡마을을 한 걸음 한 걸음 걸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그곳에 이르는 길들이 그냥 무심코 걸을 수 있는 길이 아니라 아무도 깨지 않은 새벽에 내리는 이슬처럼, 또 그 이슬을 맞으며 피어나는 연꽃처럼 아름다운 한 송이 꽃과 같다는 것을 천담리에서 강을 따라 내려가면 석전마을에 이르고, 강물이 휘돌아가는 회룡마을에서 고개를 넘어가면 요강바위가 있는 장구목에 이른다. 그곳에서 한 폭의 수채화처럼 펼쳐진 강 길을 한참 따라가면 순창군 동계면 구미리에 이른다. 거북바위가 있어서 마을 이름을 ‘구미’(龜尾)라고 이름 지었다. 섬진강 주변 그러니까 적성면, 동계면, 인계면의 퇴적 암류와 응회암 지대의 깊은 골짜기를 흘러가는 강을 특별히 적성강이라고 부른다. 강의 물이 맑아 소녀의 눈동자 같다는 적성강은 섬진강 오백 삼십 리 물길 중에서도 가장 경치가 아름답고 한적하다.
5.전북 진안군 성수면 용포리
‘자연의 신비를 느낄 수 있는 땅’
예로부터 피서지로 이름이 높았던 곳으로, 밀양 얼음골과 진안군 성수면 좌포리에 있는 풍혈냉천이 있다. 풍혈냉천에서 아름다운 섬진강 길을 따라 타박타박 내려오다가 강 건너를 바라보면 대나무 숲 사이로 빈집이 몇 채 보인다. 새로 만든 다리 아래로 손만 뻗으면 닿을 듯이 낮게 드리운 옛 다리 아래로 푸른 강물이 넘실거린다. 그 다리를 건너면 강가에 느티나무가 바짝 붙어 서 있는 마을이 용포리의 반룡마을이다. 물 맑고 아름답기로 소문난 곳이다. 옛날에 놓은 다리와 새로 놓은 다리가 마을로 이어져 있는 한적한 풍경 속으로 흘러가는 반룡마을 앞 강물은 매우 넓다. 물막이 댐이 생기기 전만 해도 반룡마을 북쪽에는 형기소가 있었고, 남쪽에는 할미소가 깊은 수심을 자랑했다고 한다. 하지만 물이 들어차면서 강의 곳곳에 소가 생기면서 그 이름을 가졌던 소는 이제 분간할 수가 없다.
6.경북 봉화군 봉화읍 닭실마을과 청암정
‘택리지에 기록된 삼남의 4대 명당’
경북 봉화군 봉화읍 유곡 마을의 청암정은 한적한 산기슭이나 강가, 서원에 딸린 것이 아니라 집 안에 있으면서도 높은 품격을 그대로 보여준다. 유곡마을은 산자락 아래에 포근하게 안겨 있는 마을로 유곡 권씨라고도 부르는 안동 권씨의 집성촌이다. 이 마을은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의 ‘금계포란형’ 명당이 있다고 해서 닭실마을이라고도 불린다. 마을 뒤쪽에 있는 산은 벼슬재 또는 배루리령, 백설령이라고도 부르는데, 동북 쪽에 있는 문수산 자락이 서남으로 뻗어내린 것이다. 하얗게 보이는 정상 부근은 마치 닭벼슬처럼 생겼다. 때문에 마을 서쪽의 산에서 바라보면 영락없이 닭이 알을 품은 모양을 이룬다. 바깥세상과 소통이 용이하면서도 은자의 집처럼 숨어 있는 곳이 봉화이며, 봉화에서도 지세가 가장 좋은 곳이 바로 닭실마을이다. 마을에 들어서는 순간, 이중환이 삼남(충청남도·전라남도·경상남도 세 지방의 총칭)의 4대 길지 중 하나로 꼽았던 것에 일말의 의혹도 품지 않을 만큼 정갈하고 아름답다는 느낌을 받는다.
7.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 운조루
‘풍요와 부귀영화가 마르지 않는 길지’
구례읍에서 베틀재라는 고개를 넘어서면 오미리 앞에 펼쳐진 들에 하죽, 환동, 오미 등의 마을이 보인다. 꽃 피는 봄날에 이 마을에 가면 누구나 꽃이 되고 누구나 자연이 된다. 마을 앞으로 작은 내가 흐르고, 매화와 산수유가 흐드러진 오리골은 금가락지가 땅에 떨어진 형국의 명당이 있다고 하여 환동(環洞)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명당 있는 곳에 으레 큰 집이 자리 잡듯, 이 마을에도 70여 칸 기와집인 운조루가 있다. 운조루 입구에 있는 안내 표지판에 따르면, 오미리 마을은 풍수지리상으로 노고단의 옥녀가 형제봉에서 놀다가 금가락지를 떨어뜨린 금환낙지의 형상이라고 한다. 그곳을 찾아 집을 지으면 자손 대대로 부귀와 영화를 누릴 수 있다는 말이 몇 백년 전부터 전해내려 왔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지리산 부근에 있다는 청학동을 이곳으로 착각하기도 했다. 이처럼 명성이 자자했으니, 삼남의 4대 길지로 알려진 것도 당연한 일이다.
8.경기도 남양주군 조안면 능내리
‘조선 최고의 명당’
우리나라의 강 중 가장 큰 두 개의 물줄기가 만나 어우러지는 곳이 팔당댐이 있는 양수리다. 금강산 부근에서 시작하여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는 두 강줄기가 합수하는 모서리 가장자리라는 뜻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때 양수리 근처에 올라갔던 한 일본인은 두물머리를 내려다보고 “조선에도 이런 명당이 있었나!”하고 감탄했다고 한다. 두물머리에서 바라다보이는 조안면 능내리는 조선 후기 실학의 집대성자인 다산 정약용이 태어나고 말년을 보낸 곳이다. 능내리는 세조 때 좌의정을 지낸 서운부원군 한확의 묘가 있으므로 능안 또는 능내라고 했다. 비선골에는 한확의 신도비가 서 있는데 팔당에서 양서면으로 가는 길옆에 자리 잡은 그의 묘는 금까마귀가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라고 한다.
9.경남 남해군 이동면 상주리
‘마음이 아름다워지는 땅’
시인 이성복은 남해 금산을 물과 흙의 혼례로 규정했고, “남해 금산은 내 정신의 비단길 혹은 비단 물길 끝의 서기어린 산으로 존재했고 앞으로도 그렇게 존재할 것이다”라고 했다. 남해군 이동면 지역으로 상주개 또는 상주포라고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으로 상주리라고 했다. 상주리 남쪽에 있는 바위섬인 세존도는 중간에 배가 지나갈 수 있을 만큼의 구멍이 뚫려 있어서 남해 38경 중 하나다. 그림처럼 빛나는 상주 해수욕장에서 고개를 넘어가면 아름다운 포구인 미조 포구가 있다. 미조항은 작은 목으로 되었으므로 미조목 또는 메진목, 미조항으로 불렸다. 한려수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항구로 자리매김하고 있고, 미조리의 들목에 있는 장군당은 고려 말의 장군이 최영 장군을 모시는 사당이다.
10.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계정마을
‘산중의 은신처’
답사를 나가서 하루나 이틀씩 머물다가 돌아와서도 가슴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서 며칠씩 떠나지 않고 머무는 그런 곳들이 있다. 그런 곳 중 하나가 바로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다. 경주군 강서면 지역으로 안강읍 옥산리와 영천시 고경면 오룡동 경계에 있는 자옥산 밑에 있어서 옥산이라 이름 지은 이곳에 아름다운 옛 절터인 정혜사와 옥산서원이 있다. 옥산서원의 누각 건물인 무변루를 비롯해 수많은 문화유산이 숨어 있는 옥산서원과 정혜사지 근처에 터를 잡고 산다면 ‘문만 걸어 닫으면 바로 이곳이 오지 같은 산중이다’라는 글이 떠오르면서 마음이 한없이 느긋해지며 일변 쓸쓸해질지도 모르겠다.
<정리 최영진 기자 cyj@kyunghyang.com>
<자료제공 ‘대한민국에서 살기 좋은 곳 33’(신정일 지음, 랜덤하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