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엄기영 앵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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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앵커’ 최고경영자에 도전

[1000자 인물비평]MBC 엄기영 앵커

'영원한 앵커’인 엄기영 앵커가 9시 뉴스데스크란 무대에서 내려간다. 엄기영 앵커는 1월 23일 임원회의에서 신임 사장 후보에 나서기 위해 앵커직을 사퇴할 뜻을 밝혔다.

‘MBC 9시 뉴스데스크’ 하면 바로 엄기영 앵커를 떠올릴 정도로 그는 MBC의 대표 앵커였다. MBC의 앵커로 정동영 전 대통합민주신당 대통령 후보, 손석희 아나운서 등의 스타가 있었지만 그는 앵커의 대명사였다. 1989년 10월부터 1996년 11월까지, 그리고 2002년 1월부터 지금까지 그는 두 차례 뉴스데스크 앵커를 맡았다.

2002년 초 만 50세의 나이로 다시 앵커 자리로 복귀할 때는 말이 많았다. MBC 뉴스데스크의 시청률이 ‘KBS 뉴스 9’의 시청률에 비해 큰 격차로 밀리면서 그는 보도본부장의 직책에서 앵커 자리를 맡았다. 뉴스 프로그램의 시청률 저하에 책임을 져야 할 보도본부장이 과연 앵커로 나서서 시청률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인지 관심이 많았다. 당시 ‘그에게 앵커가 숙명 같은 것일까’라는 내용의 기사가 나가기도 했다.

시청자에게 그는 뉴스데스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시청자들은 그를 ‘바바리’(트렌치 코트) 깃을 세운 파리 특파원으로 맨 처음 기억한다. 9시 뉴스데스크를 통해 그는 파리 에펠탑 앞에서 ‘바바리’ 깃을 세우고 “파리에서 MBC뉴스 엄기영입니다”라고 말했다. 그가 1985년부터 1988년까지 파리 특파원으로 있던 시절이다. TV 기자가 되려던 젊은이들은 파리 특파원이 되어 에펠탑 앞에서 또는 센 강변에서 바바리 깃을 세우고 “파리에서 ○○입니다”라고 리포트하는 것을 꿈꾸었다.

30대 기자였던 그는 앵커가 되어 벌써 50대 후반의 나이에 들어섰다. 그는 텔레비전 화면에서는 늙지 않은 ‘영원한 앵커’였다. 후배였던 정동영 전 후보가 일찍 정치권으로 갔고, 또 다른 앵커 후배였던 손석희 아나운서는 대학 강단으로 갔지만, 그는 여전히 앵커 자리에 남았다. 그는 앵커 겸 특임이사에서 부사장 대우 앵커가 됐다가 이번에 사장 후보에 나서기 위해 앵커 자리에 물러난다.

지난해 그는 제4회 서울대 언론인 대상을 받았다. 상을 받았지만 그에게는 축하를 받을 시간이 거의 없었다. 곧바로 9시 뉴스데스크를 진행하기 위해 떠나야 했다. 그에게는 짧게나마 인사할 시간 여유가 있었다. 그가 꺼내 든 것은 흔히 보는 연설문이 아니었다. 방송 원고도 아니었다.

자그마한 수첩이었다. 완성된 문장이 아니라 자기가 말해야 할 요점을 수첩에 적어놓은 것이 분명했다. 사람들은 그를 앵커로 생각하지만, 그는 천생 기자였다. 그는 그 자리에서 “정치권 등 외부로부터 많은 영입 제의를 물리쳤다”고 말했다.
34년 동안 MBC에서 근무한 그는 최고의 수장인 ‘사장’ 자리에 도전한다. ‘누가 사장이 될까’라는 관심과는 관계없이, 매일 저녁 9시 그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세상 소식을 듣던 시청자들은 그가 앵커에서 물러나는 것을 조금은 아쉬워할 것 같다.

<윤호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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