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이야기

소설가 홍석영이 말하는 내 고장 익산시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호남의 관문 益山익산

1933년 익산시 전경

1933년 익산시 전경

홍석영 | 원광대 국문과 교수. 문리대. 인문대 학장 역임. 현재 원광대 명예교수. 1960년 '자유문학'지에 소설가로 등단. 이후 창작집 '이적의 밤' '피서지' '우리들의 대부님' '바람과 사슬' 장편소설에 '불꽃 제단' '숲에서 나무되어' '천년의한' '양고 소세양의 빛과 사랑' 등이 있음. 현재 한국문인협회와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고문을 맡고 있다.

홍석영 | 원광대 국문과 교수. 문리대. 인문대 학장 역임. 현재 원광대 명예교수. 1960년 '자유문학'지에 소설가로 등단. 이후 창작집 '이적의 밤' '피서지' '우리들의 대부님' '바람과 사슬' 장편소설에 '불꽃 제단' '숲에서 나무되어' '천년의한' '양고 소세양의 빛과 사랑' 등이 있음. 현재 한국문인협회와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고문을 맡고 있다.

나는 익산군 왕궁면에서 태어나 1957년부터 이리시에서 줄곧 생활해왔다. 그러다 이리시와 익산군이 통합되어 익산시가 되었으니, 나는 공부와 취직 때문에 몇 년 타향살이 한 것을 빼고는 평생을 익산 땅에서 살아온 셈이다. 고향을 멀리 두고 타향살이를 하는 사람이 일쑤 느끼는 그리움과 나의 고향 정취는 애당초 다를 수밖에 없다. 어쩜 그리도 오랫동안 한 고장에 붙박아 지겹게 살아왔는지 때때로 나 자신도 이상하게 여겨진다. 직장에 매이다 보니 고장을 떠날 수 없었던 게 이유여서, 정년 퇴직을 앞두고 노후에 새로운 인정과 환경을 경험하고 싶어서라도 모처럼 훨훨 날아가는 기분으로 딴 고장으로 이사나 갈까 하고 꿈을 키워보기도 했지만, 막상 그때가 되고 보니 지엄한 현실이 옴짝달싹 못하게 나를 도로 이 고장에 주저앉혔다.

그러나마 익산은 매우 유구한 역사를 지닌 전통 있는 고을이다. 저 멀리 삼한시대에는 54개 부족국가 가운데 가장 강성했던 마한 목지국(木只國)의 중심지였으며, 백제시대 무왕 때는 한때 천도하려고 시공했다는 그 궁터 유구가 남아 있어 내 고향 왕궁리 오층석탑(국보) 근처에서 지금 한창 발굴 중이다. 그뿐 아니라 ‘서동과 선화공주’의 연기설화로 알려져 있는 미륵사지(彌勒寺址)의 서탑이 지금 해체복원 작업을 진행 중이다.

익산은 찬란한 백제문화의 창고

위_1940년 신용마을 전경<br>아래_1950년대 익산의 음식점 풍경

위_1940년 신용마을 전경
아래_1950년대 익산의 음식점 풍경

이렇듯 내 고향이 마한과 백제의 역사적 유적지라는 데서 나는 어릴 적부터 은근히 큰 자긍심을 느껴왔거니와 최근 이와 연관하여 뜻밖에 황당하고 서글픈 생각을 경험했다. 우리 고향 마을은 백제 때 거찰인 제석사(帝釋寺) 유적지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동산에는 국보로 지정된 금강바라밀경과 사리병이 일시 보관되었던 걸로 알려진 탑의 심초석이 아직도 남아 있고, 마을 곳곳에 문화재 유물을 증명하는 석재와 와당 등을 더러 발견하기도 한다.

그런 까닭에 문화재 당국이 본격적인 개발에 착수함으로써 주변사람들이 보상금을 받고 마을을 떠나게 된 것이다. 짐작컨대 우리 가계가 그곳에 뿌리내리고 살아온 지가 가히 300여 년은 넘은직한데 결국 문화재 탐사란 명목으로 뜻밖에 쫓겨난 것이다. 내가 태어나 놀던 동산이며 정겨운 골목들, 그리고 애환이 이끼처럼 끼어 있는 사촌의 집들은 어찌 되었는가?

나는 궁금증을 가지고 지난 추석 귀성길에 문화개발지를 찾았다가 깜짝 놀랐다. 추억 어린 정겨운 동산과 집 그리고 골목들이 가뭇없이 사라진 것이다. 마을의 반쪽이 곳곳에 노란 깃대가 꽂혀 있는 삭막한 들판으로 변해 있었다. 세상에 수몰민이란 말은 들어보았어도 문화재로 실향민이 된 현실은 처음 겪는 일이었다. 과거가 어쨌든 현실의 익산시는 도무지 매력 없는 도시 환경이다. 흔히 말하는 산수경개의 기본인 빼어난 산이나 강, 하다 못해 냇물조차 흐르지 않는 삭막한 도시다. 그런 대로 도심에 가까운 배산(盃山)이 있어 시민들의 휴식터로 사랑받고 있지만, 정작 산행다운 즐거움은 도심에서 7, 8㎞나 떨어진 미륵산(彌勒山)에나 가야 한다.

또 시가지에 개울물조차 흐르지 않는다. 시의 최남단에 대아댐에서 흘러내리는 물길로 만경강 둑이 있지만, 시가에는 아무런 보탬이 안 되어 이른바 열섬 현상이 가중된다. 그러니 서울시의 청계천처럼 메마른 도심을 적셔주는 인공 수로라도 파서 가까운 금강 물이라도 끌어들인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터무니없는 환상조차 갖는다.

사통팔달의 익산, 인재와 물류의 중심지

1995년 익산 기차가 폭발했을 당시 처참한 모습

1995년 익산 기차가 폭발했을 당시 처참한 모습

본시 옛 이리시의 이름은 ‘솝리·솜리’였는데 ‘속마을’이란 뜻으로 그것의 한자 표현인 ‘이리(裡里)’ 역시 뜻이 같다. 이는 긴 능선 아래 약간의 분지로 널따랗게 퍼져 있는 시가지가 지닌 지형적 특성을 드러낸 것이다.

당초 이곳을 도시로 형성한 것은 무엇보다 교통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즉 일제가 통감부를 설치하고 호남평야의 곡창에서 곡식을 수탈하여 일본으로 빼돌리기 위해 1907년에 전군도로를 개설했고, 이어 호남선 철도 부설이 본격화했다. 그러다가 본시 호남선 철도가 전주를 통과하도록 계획되었다가 유지들의 반대로 1914년에 이리를 연결지점으로 마침내 개통했다. 이로써 만경강 유역의 갈대숲 너머 이름 없는 한촌이 일약 도시로 발전한 것이다. 철도가 나면 ‘각 고을에서 뜨내기 모산지배(謀算之輩)가 몰려오는 틈에 불한당(不汗黨)이 들끓어 인심이 흉흉해진다’는 전주 유지들의 고루한 편견 때문에 익산이 되레 개방과 번영의 이득을 톡톡히 본 셈이다.

어찌 됐든 익산은 사통팔달의 교통 중심으로 호남선과 더불어 전라선과 군산선이 갈라지는 환승역으로, 또한 고속철도(KTX)가 머무는 자리로 잡혔으니, 북으론 서울, 남으론 목포, 동으론 여수, 서로는 군산으로 이어지는 익산역은 중요 물류의 핵심이 되었다. 더구나 최근에는 군산 하구둑에 철로가 부설되면서 장항선이 익산역까지 연결되었다.

이러한 교통의 발달은 급격한 인구 유입을 통해 근대적인 도시화를 꾀했으니, 해방 후 인구 3만 명의 작은 도시에서 산업화로 도약한 1970년대에 7~8만 명 그러다 10여 년 전 익산군과 통폐합하여 인구 30만 명이 넘는 중도시가 되었다.

이러한 교통의 편이는 필연적으로 인구 유통을 가속화함으로써 교육 진흥에 이바지했다. 일제강점기에 이 고장에 중등교육을 위한 시설이라고는 농림과 공업의 두 남자 실업교에 여고 하나뿐이었다. 그중 ‘이리농림고’는 호남평야의 관문이란 데에 세워진바 당시에는 농업계 고교로는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명문이었다.

광복 후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난 국민의 교육 열망에 힘입어 이 고장에는 남성중·고교란 사립학교가 설립되어 어두운 밤에 혜성처럼 명성을 떨치고, 더불어 남성여중·고가 들어서면서 짝을 이루었다. 이어 원불교 재단에서 일찍이 유일학림을 기초로 하여 원광대학을 설립해 오늘날의 유수한 명문 종합대학으로 키웠으며, 잇달아 원광 남녀 중·고교를 설립함으로써 육영재단으로 큰 공적을 세웠다. 또한 사립인 이리중·상고가 설립되었으나 오늘날 인문고로 전환되었고, 이일여중·고가 생겨 여성 교육에 크게 이바지했다.

이 무렵 고장에는 해방 후 도립인 ‘이리농대’와 ‘이리공대’가 있었으나 전북대학이 국립으로 통합하는 과정에서 농대와 공대가 전주 캠퍼스로 흡수 통합되고 말았다. 그 후 농대 자리가 ‘익산대’란 국립 전문대 체제로 운영되다가 최근 통합조치에 따라 우여곡절 끝에 전북대와 합쳐 식품과 환경 쪽 단과대로 남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익산 시민은 일찍이 이 고장에서 싹터 키워왔던 두 단과대학을 대학본부의 일방적인 편이 때문에 전주로 빼앗겼다는 데 크게 배신감과 상실감을 느꼈다. 그뿐 아니라 일제 때부터 이 고장에는 오늘날의 전주 KBS가 ‘이리방송국’이란 이름으로 있었는데 이 역시 1960년대 후반쯤 전주로 옮겨졌다. 지역을 사랑하는 시민들은 이럴 때마다 궐기하여 항의하고 진정하면서 계속 존치시키려고 애썼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도청소재지인 전주시라는 우월권 앞에 맞서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이 무렵 ‘이리기독교방송국’이 교계의 후원을 받으며 어렵사리 터를 잡아 성장을 꾀하더니 이마저 전주로 옮겨가고 말았다. 그리하여 지금은 원불교에서 운영하는 라디오의 ‘원음방송’과 ‘금강 케이블 TV 방송국’이 있고, 지역신문으로 ‘익산신문’이 있어 빈약하나마 이 고장 언론의 맥을 유지하고 있는 형편이다.

1970년대 자유수출지역 지정으로 번영기 누려

익산의 KTX 정차역 모습

익산의 KTX 정차역 모습

대개 어느 지역이나 그러하듯 지역 발전에는 산업을 우선시할 수밖에 없다. 익산 역시 1970년대 ‘자유수출지역’으로 지정되면서 지역 번영에 크게 발돋움하게 되었다. 공단을 조성하고 산업도로를 내고 인구 유입에 따라 아파트를 짓는 등 활력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익산 공단에서 대표적으로 알려진 산업은 귀금속 공예품이었다. 전국에서 단일 품목으로 이곳처럼 큰 규모의 공장이 집단화한 곳은 없다. 이로 인해 익산시는 ‘보석 도시’를 자칭하며 홍보하고 있다. 지금은 옛 수출지역을 벗어나 제2, 제3 공장지대로 넓혀 기계·화학·전자 등 각종 공장이 빽빽이 들어서 비약적인 발전상을 보이고 있다. 그러고 보면 익산시는 당초 철도 시설이란 교통의 이점으로 발돋움하여 교육도시로 발전했다가 결국 산업도시로 부흥하는 단계를 밟은 셈이다.

그런데 사람에게도 때로 길흉이 엇갈리듯 익산시에도 과거 31년 전 뼈아픈 시련이 닥친 일이 있었다. 1977년 11월 11일 밤 일어난 익산역 구내에서 발생한 이른바 ‘이리역 폭발사고’다. 그것은 ‘한국화약’이 대량의 다이너마이트를 기차로 운송하던 중 호송원 신무일이란 사람이 정차 중에 술에 취한 채 촛불을 켜놓고 자다가 불이 붙어 폭발한 것이다. 이로 인해 익산 시민 13만 명이 히로시마 원폭 투하를 연상케 하는 끔찍한 재난에 휩쓸렸다.

순식간에 귀중한 생명 68명이 사라졌고, 1500여 명이 피를 흘렸으며, 가옥 670여 채가 폭삭 무너졌고, 1200여 채가 파손되었다. 그런데 피해가 가장 컸던 곳은 사고지점인 익산역 부군인 철인동이란 속칭 ‘윤락촌’이었다. 그런 까닭에 평소 도시 미관상 골칫거리였던 그 우범 마을이 우연찮게 말끔히 사라지는 계기가 됨으로써 혹여 당국이 은밀히 사고를 공작한 거 아니냐는 엉뚱한 유언비어가 나돌기도 했다.

이제 그 참극이 있은 지 30년이 지났다. 도도한 강물이 혼탁한 세월의 굽이를 안고 유유히 흘러가듯 아직도 그 후유증에 시달리는 사람이 있을 터인 데도 역사는 너무 쉽사리 과거와 등을 돌린다. 그때 이름 없이 죽어간 불쌍한 창녀들의 아련한 기억 대신, 그때 이재민 보상용으로 세운 아파트가 어느덧 세월이 흘러 재건축의 논의 속에 다시금 옛 추억의 흔적조차 지우려 하고 있다. 그처럼 익산시는 지금 미래를 향한 힘찬 동력으로 50만 명 인구를 목표로 삼아 살기 좋은 고장으로 거듭나려고 하고 있다.

관련기사

바로가기

주간경향 댓글 정책에 따라
이 기사에서는 댓글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