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의 명장 명인

국내 유일 보석 가공 장인 김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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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신 보석가공기술 도입의 산증인

[익산의 명장 명인]국내 유일 보석 가공 장인 김찬

국내에 유일한 보석가공 명장이 있다. 45년째 천연 보석을 가공해온 김찬씨(58). 전북 익산시 영등동에 있는 66㎡(20여 평)의 조그마한 작업장에서는 지금도 원석과 씨름하는 김 명장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김 명장은 생활고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순전히 먹고살기 위해 14세인 1963년에 시내 보석가공 공장에 취직했다. 당시 한국의 보석가공 기술은 황무지나 다름없었다. 1960년대 무렵부터 본격적인 보석가공 기술이 대중화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보석가공 방식은 비취와 호박 등으로 왕관과 비녀 등을 만들던 전통기법이었다. 서양기술을 전수받은 뒤부터 자수정과 황옥(토파즈), 석류석(가넷) 등 천연 보석으로 반지와 팔찌 등을 만들었다. 김 명장은 우리나라에 새로운 보석가공 기술을 도입하고 활성화한 산증인이다. 김 명장은 “1960년대 국내에는 연마(커팅) 도안조차 없어 미군 부대에서 서양 잡지를 빼내 기술자들끼리 공장에 모여 독학해야 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거의 독학하다시피 보석가공 기술을 습득한 김 명장은 기술력을 인정받아 서울에서 꽤 큰돈도 벌었다.

사업이 번창하면서 몇 번의 위기도 왔다. 국교 단절 위기까지 유발했던 문세광의 육영수 여사 암살사건이 결정타였다. 당시 가공보석은 국내용보다 주로 일본 손님의 주문을 많이 받아온 터였다. 거래선 없는 사업은 모래성 쌓기와 같다. 사업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실의에 빠진 김 명장을 일으켜세운 건 그의 아내였다. 아내에게 틈틈이 선물했던 원석이 재활의 밑천이 된 것이다.

한국 보석연마 기술 역사를 보여줄 공간 마련할 터
김 명장의 기술력은 한국 보석가공 기술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타원형 거북 커팅 기술’ 개발 등 45여 년에 걸쳐 200여 개의 가공연마 기술을 내놓았다. 기술력과 예술성을 겸비한 김 명장의 상품은 국내 소매상과 면세점 등에 납품 계약이 줄을 이으면서 한때 20억 원에 달하는 연매출을 올렸다. 1990년대부터 중국산 합성석이 대량으로 유입되고 경제 불황이 겹치면서 차츰 사업 규모를 줄여야 했다.

김 명장은 “젊은이들의 보석 가공일을 3D 업종으로 인식해서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라며 “중국산에 밀리고 있는 상황에서 배우려는 사람도 없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라고 말했다. 기술을 남겨주기 위해 문하생도 10여 명 들였지만 “벌이가 되지 않는다”며 대부분 떠나갔다. 10여 년 전에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묵묵히 참고 견디던 가장 아끼던 문하생이 불의의 교통사고로 곁을 떠났다.

현재는 슬하에 둔 1남 1녀 중 막내딸인 승희씨(32)가 대학원에서 보석디자인을 전공하며 틈틈이 김씨의 작업장을 찾아 ‘가업’을 잇고 있다. 회색빛을 띠는 울퉁불퉁한 돌멩이 상태인 원석(原石)으로 보석을 깎아내려면 10가지가 넘는 과정에 수십 번의 손품을 팔아야 한다. 필요한 크기대로 재단한 원석을 흐르는 물에 대강의 모양을 잡으면서 깎아낸 뒤 연마, 다듬기, 광택내기 등을 거친다.

이처럼 보석가공은 인내와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 기술이다. 쉽고 편한 일을 찾는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배우기가 꺼려지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김 명장은 걱정하지 않는다. 어디선가 보석가공의 오묘함을 느끼고 도전하는 젊은이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김 명장은 “50년 역사를 가진 국내 보석 연마 기술을 한자리에 모은 전시 공간을 작게나마 마련하는 것이 작은 소망”이라며 웃었다.

<김태열 기자 yol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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