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키스탄 ‘가문정치’ 빛과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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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토가문 현대사에 큰 족적 남겼지만 민주세력 성장 저해요인 지적도

지난 12월 31일 파키스탄 라호르에서 파키스탄인민당 지지자들이 암살된 부토 베나지르 전 총리를 추모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지난 12월 31일 파키스탄 라호르에서 파키스탄인민당 지지자들이 암살된 부토 베나지르 전 총리를 추모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최근 국제적 주목을 받고 있는 파키스탄의 부토 가문은 누가 뭐래도 파키스탄 최고의 명문가다. 인도의 네루-간디 가문, 미국의 케네디가에 비견되기도 한다. 부토가는 격동의 파키스탄 현대사에서 최초의 선출직 총리를 비롯해 총리 2명을 배출했다. 독립투사부터 시작해 군부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화 운동에도 앞장섰다. 베나지르 부토 전 총리(이하 부토)의 암살 등 대를 이은 비극적 가족사도 파키스탄 사람들에겐 각별하게 다가온다.

그러나 부토의 장남 빌라왈 부토 자르다리가 최근 어머니의 뒤를 이으면서 부토가의 ‘가문정치’가 도마에 올랐다. ‘부토 왕조’란 지적도 있다. 부토가의 화려한 이력 뒷편의 어두운 그림자도 조금씩 드러났다. 이는 ‘가문정치’가 과연 파키스탄의 민주화에 실제 도움을 줄 것인가라는 질문에서다. 4대째에 이른 가문정치가 오히려 파키스탄 내 다양한 민주세력의 등장을 막을 것이란 우려 때문이다. 실제 인도,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아시아의 일부 가문정치는 족벌 부패로 막을 내리기도 했다.

비극으로 이어진 명문 부토 가문

베나지르 부토 전 총리(윗줄 오른쪽)가 1978년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 윗줄 왼쪽부터 어머니 누스라트 여사, 남동생 샤흐나와즈, 아버지 줄피카르 알리 부토 전 총리. 아랫줄 왼쪽은 동생 무르타자, 그 옆은 자매지간인 사남.

베나지르 부토 전 총리(윗줄 오른쪽)가 1978년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 윗줄 왼쪽부터 어머니 누스라트 여사, 남동생 샤흐나와즈, 아버지 줄피카르 알리 부토 전 총리. 아랫줄 왼쪽은 동생 무르타자, 그 옆은 자매지간인 사남.

부토 가문은 부토의 할아버지이자 빌라왈의 외증조부인 샤 나와즈 부토 때부터 파키스탄 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파키스탄 남부 신드주의 대부호였던 그는 독립투사로 신드인민당을 창당해 파키스탄의 독립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한다. 그의 아들이자 부토의 아버지인 줄피카르 알리 부토 대에는 파키스탄의 핵심 가문으로 떠오른다. 외무장관 출신인 줄피카르는 1967년 정권과 등을 돌리고 지금의 파키스탄인민당(PPP)을 창당하고, 1973년에는 파키스탄 최초의 민선 총리에 오른다.

그러나 이때부터 부토가의 비극은 시작된다. 1977년 그는 울 하크 장군의 군부 쿠데타로 실각했다. 1979년에는 정적 살해 교사 혐의로 군부정권에 기소됐다. 파키스탄 군부정권은 국내외의 큰 반발에도 불구하고 그를 교수대로 보냈다. 1985년에는 부토의 막내 동생인 샤나와즈가 프랑스의 아파트에서 약물중독으로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그러나 부토가는 꿋꿋하게 견뎌냈다. 아버지가 처형된 후 군부 정권에 투옥돼 3년간의 옥살이를 한 부토는 망명길에 오른다. 1988년 하크 대통령이 비행기 폭파사고로 숨지자 귀국한 부토는 어머니 누스라트 부토가 맡고 있던 당대표직을 이어받아 PPP를 이끌고 총선에 나선다. 그리고 1988년 9월 마침내 승리하면서 그녀는 이슬람권 최초의 여성 총리, 35세의 최연소 총리란 영예를 안는다.

그러나 부토가의 비극은 계속됐다. 부토가 두 번째로 집권한 1996년 남동생 무르타자가 카라치의 집 앞에서 총격을 받아 숨을 거뒀다. 이어 지난해 연말 부토 암살로 아버지와 3남매가 모두 죽어 부토가는 그리스 비극을 연상시킨다.

부토 가문, 파키스탄의 희망(?)
부토가 이끌던 파키스탄 최대 야당인 PPP는 최근 부토의 아들 빌라왈(19)과 남편 아시프 알리 자르다리(51)를 후계자로 뽑았다. 영국 옥스퍼드대 1학년인 빌라왈이 아직 어려 아시프가 당분간 당을 실질적으로 이끌게 된다. 이름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이라는 뜻을 지닌 빌라왈은 부토가 만삭의 몸으로 총선에 뛰어들어 첫 승리를 거둘 때 뱃속에서 함께한 주인공이다. 그러나 어린시절 그는 망명길에 오른 어머니를 따라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와 런던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귀족학교 출신인 그는 승마와 사격을 좋아하며 태권도 검은 띠를 보유할 정도로 스포츠에도 큰 관심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어머니의 모교에서 역사학을 전공하는 그는 우선 학업을 마치기 위해 런던으로 되돌아가 런던경찰청의 철통 같은 24시간 경호를 받게 된다.

빌라왈을 보좌하기 위해 PPP공동의장을 맡은 아시프는 신드주 자르다리 부족장 출신이다. 부토는 아시프와의 결혼과 관련해 자서전 ‘운명의 딸’에서 “중매결혼은 내 정치적 행로를 위해 치러야 할 대가였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는 부토 집권 당시 상원의원과 환경장관을 역임했다. 그러나 장관 재직시절 관급공사 계약 때 늘 ‘수수료 10%’를 요구해 각계 인사들 사이에선 ‘미스터 10%’란 부끄러운 별명이 붙기도 했다. 군부정권 아래서지만 부패 혐의로 복역도 했다. 일부에선 그의 부패가 당시 부토 정부의 실각을 앞당긴 원인으로 분석하기도 한다.

가족당, 가문정치 부작용 드러날 수도
빌라왈이 PPP를 대표하면서 ‘가문정치’에 대한 우려가 다시 제기되었다. PPP는 실제 40년 동안 줄피카르에 이어 그의 아내, 딸 부토 그리고 외손자까지 대표를 맡아 ‘가족당’이라는 비아냥도 들린다. 국제사회의 일반적 정서와 달리 빌라왈이 후계자가 됐을때 파키스탄 전문가들은 놀라지 않았다. 정치인의 능력이나 경력 등보다 핏줄과 가문의 영향력을 중시하는 파키스탄 문화 때문이다.

실제 PPP 지지자들은 빌라왈에게 지지를 보냈다. PPP 지도부원이자 전 미국 주재 대사인 아비다 후세인은 “빌라왈은 후계자로서 중요하다”며 그 이유를 “우리 문화에서 혈통은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빌라왈이 당초 ‘빌라왈 자르다리’에서 부토를 넣어 ‘빌라왈 부토 자르다리’로 개명한 것도 혈통의 중요성을 상징한다. 정치분석가 샤프카트 마흐무드는 “아시아의 제3세계, 특히 파키스탄에서 혈통은 법적 정통성을 잇는 개념”이라며 “빌라왈이 이름을 바꾼 것도 바로 그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부토가의 ‘가문정치’는 ‘부토 왕조’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파키스탄 내 다양한 민주세력의 성장을 막을 수 있다는 우려가 높다. 남아시아 전문가인 미국 터프츠대 아에샤 잘랄 교수는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지와 인터뷰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숱한 말들을 쏟아내면서도 정작 PPP당 내부에는 민주주의가 없다”고 말했다. 이슬라마바드의 정치학연구소 칼리드 라흐만 연구원도 “정치적 프로세스가 이뤄지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리더십의 등장은 매우 어려운 게 현실”이라고 분석했다.

이미 가문정치의 한계는 가문 내 반목과 갈등으로 불거지고 있다. PPP 창당에 참여한 부토가의 원로 뭄타즈 부토는 “(아시프와 빌라왈은) 부토가가 아니라며 그들을 PPP의 지도자로 용납할 수 없다”고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IHT)에 말했다. IHT도 “부토 암살 이후 부토 가문의 뿌리 깊은 반목양상이 적나라하게 모습을 드러낸다”며 무르타자의 죽음에 부토가 개입했다는 의혹 등 부토가의 어두운 측면을 조명했다. 가문 내 분열은 PPP 지지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국제부┃도재기 기자 jaek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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