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하중 주중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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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인맥 두터워 북한문제 대처 신속

[1000자 인물비평]김하중 주중대사

김하중 주중한국대사가 대사직을 6년 3개월째 수행하면서 역대 최장수 대사 4위에 올랐다. 김 대사는 국민의 정부 시절인 2001년 10월 주중한국대사로 발령받아 베이징에 부임한 이후 지금까지 대사로 근무하고 있다.

그에게는 항상 ‘중국통’ ‘의전의 최고수’ ‘완벽주의자’라는 말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닌다. 김 대사는 어려서부터 중국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1960년대 학창시절, 성적이 매우 우수했던 그는 남들이 선망하는 법대나 상경대가 아닌 서울대 중문학과를 택했다. 김 대사의 저서 ‘떠오르는 용 중국’의 서문을 보면 대학에 들어갈 때부터 대(對) 중국 외교에 대한 비전을 확실히 인식하고 입학했다고 써 있다. 그의 탁월한 혜안은 30여 년 후인 1992년 한·중수교로 증명됐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외무고시(1973년)에 합격해 외무부(현 외교통상부) 장관보좌관, 주일본대사관 참사관을 거쳐, 1992년 주중국대사관 (정무)공사로 부임했다. 역사적인 한·중수교의 스포트라이트는 당시 이상옥 외무장관과 중국의 첸지천 외교부장이 받았지만 그 뒤에는 김하중 공사가 있었다.

한국과 중국이 수교한 지 어느덧 15년이 지났다. 우리나라 외교에서 중국의 중요성은 두말할 것 없이 중요하다. 특히 북한을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나라가 중국이라는 점에서는 더욱 더 그렇다. 또한 한국과 중국은 양국의 복잡한 역사만큼이나 크고 작은 일이 많이 벌어지고 있다. 북핵 문제, 탈북자 문제, 역사왜곡 문제 등 미묘한 외교문제를 불러일으킬 만한 것이 많다.

김 대사는 실타래처럼 얽힌 사안들을 특유의 근면성과 인맥으로 푼다. 그는 항상 일이 없는 토요일·일요일에도 출근해 상황을 체크한다. 이 같은 습성이 한·중·북한 관련 문제가 발생하면 기민하게 대응할 수 있는 원동력이다. 2002년부터 3여 년 동안 주중대사관에서 근무해온 노규덕 외교부 중국·몽골 과장은 “최근 몇 년 동안 북한이 대형 사고를 친 날은 주로 연휴나 주말이었다”면서 “김 대사는 그때마나 중국 정부와 접촉·확인해서 본국에 신속히 보고했다”고 회고했다.

김 대사는 또한 중국 외교부의 실세들과 가장 많이 알고 있으며, 중국어로 현지 대학에서 강의하고 질문에 응답할 만큼 중국문화에 능통하다.

김 대사는 외교관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의전업무에도 탁월하다. 1994년 김대중 당시 아태재단 이사장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의전을 맡은 것이 인연이 되어 김대중 이사장이 대통령에 당선하자마자 김 대사의 의전을 잊지 못해 청와대 의전수석비서관으로 발탁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하지만 ‘그가 정보를 독점한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나온다. 이런 평가가 그와 함께했던 직원들이나 베이징의 한국 특파원들의 불만이고 보면 아예 틀린 얘기는 아닌 듯싶다.

김하중 대사는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대사직을 마무리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에 이어 과연 새 정부도 그를 계속 중용할지 궁금하다.

<권순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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