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러시아 미술은 그다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올 초 이주헌의 ‘눈과 피의 나라 러시아 미술’이라는 책이 나오면서 베일에 가려져 있던 러시아 미술이 살짝 모습을 보인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러시아 화가라고 해야 칸딘스키와 샤갈 정도만 우리에게 친숙하다(그나마 샤갈은 출신이 러시아일 뿐 주로 러시아 밖의 나라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러시아에는 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거장이 수두룩하다. 이진숙의 ‘러시아 미술사’는 러시아 미술의 진정한 면모를 우리 앞에 펼쳐 보여준다.
러시아는 전 세계에서 으뜸 가는 예술의 나라다. 문학이 그렇고 음악이 그렇고 발레가 그렇다. 그런데 왜 유독 미술만 베일에 가려져 있는 것일까. 미술사의 고전으로 평가받는 곰브리치의 ‘서양 미술사’에서도 러시아 미술은 배제돼 있을 정도다. 이 책의 저자 이진숙은 러시아 미술이 서양 미술사에서 소외된 까닭은 ‘이데올로기 문제’ 때문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거장이라고 이름 붙여도 무방한 숱한 작가가 합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저자가 생각하는 러시아 미술의 내재적 속성이자 핵심은 ‘삶과 미술을 결코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러시아의 역사를 살펴보면 비단 미술뿐 아니라 러시아의 모든 예술이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다. 서방이면서 동방인 지리적 위치, 오랫동안 유지됐던 봉건제, 사회주의 혁명, 피비린내 나는 내전의 연속과 세계대전, 사회주의의 붕괴와 개혁 그리고 그에 따른 혼란 등 러시아 역사는 단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격동의 세월을 보냈다. 이러한 정세에서 예술이 한가한 모양을 취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12세기 이콘화부터 시작해 18세기 초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미술 아카데미’가 설립되면서 배출된 전문화가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활동한 이동파 화가들, 상징주의와 모더니즘을 고리로 러시아 미술과 서유럽 미술을 연결시킨 예술 세계파, 나움 가보와 칸딘스키의 바우하우스에서 활동한 구성주의에 영향을 준 아방가르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난 후 번창한 사회주의 리얼리즘 작가들과 현대 러시아 작가들… 이들은 모두 러시아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대변한다. 러시아 미술에서 종종 볼 수 있는 풍경화마저 사람과 삶, 역사를 속 깊이 담고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여섯 개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러시아의 1000년간 미술사를 꿰뚫는다. 저자는 12세기 이콘화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이 책의 문을 연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 등 성경 속 인물을 그린 이콘화는 러시아에서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일종의 성물이었다. 러시아 미술이 본격적으로 민중의 곁으로 다가간 때는 18세기 초 표트르대제의 개혁 시기다. 이 시대에 트로피닌, 소로카 같은 농노 출신 화가들이 러시아 민중들의 삶을 담은 풍속화를 그렸다. 알렉산드르 이바노프의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는 러시아 미술이 마침내 이콘화를 극복해냈음을 보여준다.
1870년 결성해 1923년 해체할 때까지 50여 년간 활동한 ‘이동파’는 러시아 화가들의 참여적·사실적 성격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러시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동시대의 예술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이동해가며 전시회를 개최한다는 의미에서 ‘이동파’라는 이름을 달았다는 데서도 알 수 있듯 이동파 화가들의 의식은 민중의 삶 속으로 치열하게 파고들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러시아 미술이 얼마나 중요한지, 심지어 최근 미술 경매에서 러시아 미술 작품이 왜 고가에 낙찰되는지 알 수 있다.
<임형도 기자 lhd@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