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집권 노리는 푸틴 퇴임 후 시나리오… 얼굴마담 내세우고 자신이 실권 행사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55)이 미국 시사 주간 ‘타임’이 정한 ‘올해의 인물’로 선정됐다. 올 한 해 세계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라는 점에서다. 푸틴은 혼란한 러시아를 안정적으로 변화시킨 공적을 인정받아 러시아 국민들에게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최근 들어 장기 집권을 어떻게 달성할 수 있을지 골몰하는 모습이다. 푸틴은 내년 5월 퇴임 이후 총리로 재등장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는 등 권력 유지를 위한 절차를 하나둘 밟아나가고 있다.
푸틴의 장기 집권 야욕
푸틴은 대통령 3선 연임 불가를 규정한 러시아 헌법에 묶여 내년 3월 실시하는 대선에 출마할 자격이 없다. 세간에서는 국민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푸틴이 법 규정을 살짝 피해가며 권력을 계속 유지할 것이라는 추측이 지배적이었다. 대선을 3개월 여 앞둔 시점에서 그 같은 예상은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푸틴은 지난 10일 국영 가스회사인 가즈프롬 회장과 제 1부총리를 겸하고 있는 드미트리 메드베데프(42)를 자신의 후계자로 공식 지명했다.
또 “러시아 국민이 메드베데프를 대통령으로 뽑아준다면 나는 정부를 이끌 총리직을 맡을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12월 2일 총선에서 친 푸틴 성향의 통합러시아당이 64%의 압도적인 지지율로 승리를 거둔 데다 최근 여론조사 결과 국민의 50% 이상이 ‘내년 대선에서 푸틴이 지명한 사람에게 표를 던지겠다’고 답한 이상 메드베데프는 사실상 차기 대통령이나 마찬가지다. ‘대통령 메드베데프-총리 푸틴’ 구도가 완결된 것이다.
그러나 푸틴이 자신의 ‘정치적 양자’나 다름없는 메드베데프를 대통령으로 ‘받들어 모시는’ 상황은 예상하기 어렵다. 푸틴이 메드베데프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실권을 쥐는 ‘수렴청정’을 하거나, 러시아 헌법을 개정해 총리 권한을 강화하거나 메드베데프를 탄핵한다는 등의 시나리오가 나오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일각에서는 러시아가 1991년 소련 붕괴와 함께 분리된 벨로루시와 통합하면 자연스럽게 권력 구도가 개편되고, 이때 푸틴이 통합국가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시나리오도 나오고 있다.
왜 메드베데프인가
메드베데프는 푸틴에 대한 충성도가 가장 높은 인물이다. 둘은 인간적으로 강하게 연대해 왔다. 같은 상트 페테르부르크 출신에다 대학 동문이다. 1990년대 초반 시에서 법률 전문가로 일하며 푸틴과 인연을 맺은 메드베데프는 이후 푸틴을 측근에서 보좌하는 등 단 한 번도 푸틴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메드베데프가 푸틴보다 자유롭고 개방적인 성격이어서 둘 사이의 갈등이 생길 수도 있다는 관측이 있지만 푸틴의 경제 보좌관 출신 안드레이 일라리오노프는 이 같은 관측에 대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했다.
메드베데프는 과거 푸틴의 구미에 맞게 행동하기 위해 관료들이 언론과 접촉하는 것을 일체 금지했으며 규칙을 깰 경우 엄중하게 문책했다. 지금도 ‘푸틴의 후계자’라는 것을 부각시키기 위해 애쓰고 있다. 후계자 수락 연설에서 그는 푸틴의 목소리와 스타일을 흉내내며 “우리나라를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은 푸틴이 러시아 연방을 통치하는 최고 위치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메드베데프가 비즈니스에 관심을 보여왔다는 것도 푸틴에게 좋은 평가를 받은 이유로 분석된다. 국방장관 출신의 세르게이 이바노프(54)가 군내 부패와 폭력 등의 문제를 다루며 강성 이미지를 굳혀왔다면, 메드베데프는 보건, 교육, 농업, 주택 등 장기 발전 프로젝트를 맡아 일하며 부드러운 이미지를 부각시켜왔다. 또 정보기관에서 근무한 경험이 없고 정당이나 정치세력을 이끌어본 적도 없다. 푸틴보다 13살이나 어리고 경험도 일천하지만 2012년 권좌 복귀를 노리는 푸틴에게는 이런 메드베데프가 더없이 적합한 후계자였다는 평가다.
푸틴의 후계자 길들이기
그러나 푸틴은 메드베데프를 후계자로 발표하기 앞서 수 많은 가능성을 열어놓음으로써 ‘후계자 길들이기’를 성공적으로 해왔다. 메드베데프는 2005년 말 푸틴의 뒤를 이을 유력한 대선주자였다. 푸틴은 2005년 11월 메드베데프에게 수십억 달러의 프로젝트를 위임했고 제 1부총리로 승격했다. 메드베데프는 연설에서 러시아인들에게 더 나은 삶을 가져다주겠다고 야심차게 약속했고, 당시 여론조사에서 러시아인의 35%가 그를 차기 대통령으로 생각한다고 답했다. 메드베데프가 살고 있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아파트 외벽에는 “러시아 미래의 대통령, 이곳에서 태어나다”라는 낙서를 누군가가 해놓기도 했다.
그러나 메드베데프가 인기를 얻자 푸틴은 갑자기 다른 인물을 부각시키기 시작했다. 전 국가보안위원회(KGB) 소속이며 국방장관인 세르게이 이바노프를 메르베데프와 같은 자리인 제 1부총리에 임명한 것이다. 이바노프는 ‘반 서방 정서’와 관련해 푸틴과 잘 어울리는 한 팀이었다. 이바노프의 인기는 갑자기 치솟았고 여론조사에서 러시아인의 약 37%가 이바노프가 차기 대통령감이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그러나 러시아 주요 언론들이 이바노프를 차기 총리로 언급하기 시작한 순간 푸틴은 또다시 다른 인물을 주목했다. 이번엔 세간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빅토르 주브코프(66)였다. 주브코프는 지난 9월 전격 총리로 발탁되면서 차기 후계자로 부상했다. 그러나 결국 마지막 순간 푸틴은 메드베데프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누구에게도 후계자에 대한 확신을 주지 않으며 최대한 자신의 권력을 키워나간 것이다.
푸틴이 장기 집권 야욕을 달성하기 위해 계획한 과정은 이처럼 치밀했다. 그의 의도대로 향후 메드베데프는 푸틴의 충성스러운 대리인이 될 가능성이 높다. 2012년 푸틴이 다시 대권을 잡으리란 예상도 빗나가진 않을 듯하다. ‘신(新) 차르 시대’의 도래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푸틴의 비판세력들이 조금씩 고개를 내미는 등 러시아 내부 균열이 조금씩 감지되고 있다. 과욕은 언제나 화를 부른다. 혼란한 러시아 경제를 안정시킨 국가 영웅으로 남을지, 자리를 지키기 위해 어떤 일도 불사하는 권력욕의 화신으로 남을지 푸틴의 손에 달려 있다.
<국제부┃김정선 기자 kjs043@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