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와 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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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권력이 정치권력을 압도하다

셸던 월린 지음·강정인 외 옮김·후마니타스·1만8000원

셸던 월린 지음·강정인 외 옮김·후마니타스·1만8000원

인구가 팽창하고 사회가 빠르게 변화하면서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하기란 거의 불가능해졌다. 직접 민주주의는 기원전 5세기께 아테네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 대안으로 만든 것이 대의제 민주주의, 헌정적 민주주의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이것들이 민주주의를 대표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미국의 대표적인 정치사상가인 셸던 월린은 그의 저작 ‘정치와 비전’에서 많은 사람이 민주주의라고 이해하는 대의제 민주주의와 헌정적 민주주의가 사실은 진정한 민주적 정신을 가로막고 민주 시민의 가치를 훼손한다고 주장한다. 월린이 생각하는 민주주의는 시민들의 자발적이고 활기찬 참여와 숙의를 중시하는 참여 민주주의인데, 대의제 민주주의와 헌정적 민주주의는 이를 차단하고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시민들을 오히려 속박하기 때문이다. 월린이 현대 민주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급진 민주주의자라고 평가받는 것도 이러한 주장 때문이다.

1960년 출판된 ‘정치와 비전’은 지금까지 수많은 학생과 정치사상가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출간 즉시 이 책은 정치사상사에 큰 획을 긋는 기념비적인 저작으로 꼽혔으며 이 책의 출간으로 저자 셸던 월린은 일약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정치사상가로 뛰어올랐다. 출간 이후 44년이 지난 2004년 월린은 ‘정치와 비전’의 증보판을 냈다. 이 증보판이 이번에 국내에 번역되어 먼저 1권(전 3권)이 출간됐다.

월린의 ‘정치와 비전’은 플라톤의 정치철학, 종교가 정치화한 초기 기독교 시대, 루터의 종교개혁 등 2500여 년 전의 정치사상을 이야기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다시 말해 월린은 정치사상사를 쓴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단순한 역사가 아니라고 느껴지는 까닭은 2500여 년 전의 사상이 오늘날 우리의 현실과 완전히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증보판이라고 해서 44년 전의 초판을 뒤흔든 것은 아니다. 초판에서 다룬 플라톤에서 밀까지 정치사상가에 대한 10개 장을 그대로 놔두고 여기에 마르크스, 니체 등 정치사상가들에 대한 7개 장을 추가한 것이다. 추가한 7개 장에서 월린은 마르크스, 니체, 탈근대주의자 등 정치사상가들이 근대 권력의 가능성과 그 위험을 어떻게 보았는지 설명한다.

추가한 내용에서 월린은 주로 초강대국 미국의 절대권력을 다룬다. 여기서 핵심 용어는 ‘전도된 전체주의’다. ‘전도된 전체주의’란 경제적 권력이 정치적 권력을 압도하는 새로운 정치적 형태를 말한다.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대부분 사람이 공적 가치를 등한시하고 사적 이익에만 몰두하는 비민주적 시민이 활개를 치는 모습을 월린은 꽤 경멸한다. 그렇다고 해서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마냥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사적 이익 못지않게 공적 가치도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건전한 민주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월린의 주장이다.

월린은 민주주의는 국가의 정치제도 바깥에 존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히 세계화와 자유주의의 물결이 거센 오늘날, 민주주의는 정치적 자유주의의 결박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같은 주장 때문에 월린은 자신이 제시하는 민주주의를 스스로 ‘탈주적 민주주의’라고 명명한다.

궁극적으로 월린은 이 책에서 진정한 민주주의를 추구한다. 월린이 추구하는 민주주의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은 ‘민중적 활력’이다. 자유주의와 거짓 민주주의로 민중을 속박하는 국가와 제도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시민 스스로 활기차게 참여할 것을 요구한다.

<임형도 기자 lh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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