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인류학의 ‘부적절한 종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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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이라크에 학자 투입 ‘현지 이해’ 전술… 학계서 ‘학문의 군사화’ 거센 반발

"인류학자의 노하우가 이라크 사태 안정에 기여한다.” “총을 든 인류학자가 될 순 없다.” 전쟁터를 누비는 ‘종군기자’처럼 때때로 전쟁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사회과학자도 현장을 찾는다. 현지조사에서 생생한 자료를 수집해 더 정확하고 풍부한 연구를 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지금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있는 일군의 미국인 학자는 조금 특수하다. 주로 문화인류학 전공자로 이뤄진 이들은 현지에 주둔하는 미군의 지휘체계 아래 있다. 이들은 미 국방부가 올해 초부터 시작한 미군 산하 ‘인간 분야 시스템’(Human Terrain System·이하 HTS)으로 고용된 ‘민간인’이다. HTS는 대테러 전쟁의 늪에 빠진 정부가 ‘현지 문화 이해’를 돌파구로 삼으면서 확대되고 있다.

시사주간지 유에스뉴스는 “인류학자는 이라크 저항 세력과의 싸움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무기”라고 매김했다. 어느 때보다 이라크전 반대 여론이 높은 미국 사회에서 학자들의 ‘전쟁 참여’는 뜨거운 쟁점이 되고 있다.

‘종군’ 인류학자?
바그다드 남부의 팔콘 기지 제1사단 제4여단 전투부대에 배치된 HTS 팀원인 파우드 르흐자우이는 아랍어에 능통한 문화전문가다. 마을 주민에게서 누군가 도로매설폭탄을 설치하려 한다는 내용의 제보를 은밀히 받은 그는 부대의 미군에게 “그 주민에게 체포하겠다고 협박하며 소리 지르라”고 조언한다. 미군 부역자로 낙인 찍힐 경우 목숨까지 위태로운 주민을 안심시키기 위해서다.

HTS의 기본 취지는 이처럼 현지 문화에 대한 미군의 이해를 높여 효율적인 전술을 구사하는 데 있다. ‘물량 공세’만으로는 복잡한 종족·종파 갈등을 도저히 다룰 수 없다는 인식에서 출발했다. 인류학자와 언어전문가를 포함해 군인과 정보 담당, 공익 업무 경력자 등 5~6명으로 구성된 HTS는 전투부대와 함께 이동한다.

군과 학계의 새로운 ‘파트너십’은 이렇게 탄생했다. 군은 이라크인의 ‘마음을 얻는’ 전략을 짜려면 군사작전 지역 내의 다양한 사회집단 간의 관계를 이해, 설명하는 능력을 갖춘 전문가들이 필요했고, 이런 훈련을 받은 문화인류학자들을 유치하는 데 나섰다.

미군의 자체 평가는 긍정적이다. 아프간의 한 지역은 인류학자들이 합류한 뒤 군의 전투작전이 60%가량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HTS 책임자인 퇴역장군 스티브 폰다카로는 “사회 내 의사결정 방식과 행동양식의 기원 등을 연구하는 문화인류학자들은 우리의 목표 집단의 시선으로 문제를 가장 잘 파악하기 때문에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HTS는 1인당 연간 40만 달러가량이 들어가는 ‘고비용’ 프로그램이다. 그러나 미 정부는 지난 9월 HTS 숫자를 6개에서 26개까지 늘리고 예산도 4000만 달러 증액하는 등 대대적인 확대에 나섰다.

학계 거센 반발
하지만 학계의 호응은 그리 신통치 않은 상황이다. 활동 기간이 6~9개월로 짧고 보수도 높지만, 박사급 연구진의 참여가 저조해 이라크팀은 배치 일정을 미뤄야 했을 정도다. HTS의 활동도 순탄치만은 않다. 군인이냐 민간인이냐를 떠나 이라크에서 미국인, 아니 서양인은 공격의 표적이자 극도의 불신 대상이다. 군인들과 같은 팀에서 일하는 것도 문화적 충돌이 불가피하다.

미국 인류학계 내부에서는 미군의 일원으로 활동하는 것이 ‘연구윤리’를 저해한다는 비판이 거세다. 특히 18~19세기 제국주의 열강들의 식민 지배에 필요한 지식을 제공했다는 ‘전력’ 탓에 ‘학문의 군사화’ ‘용병 인류학’ 같은 안팎의 비판에 더욱 민감하다.

시사주간지 타임 인터넷판은 지난달 말 워싱턴 D.C에서 개최한 2007 미국인류학회 연례학술대회에서 이에 대해 열띤 공방이 벌어졌다고 전했다. 인류학자의 국가안보활동 참여에 관한 특별위원회는 별도의 보고서에서 HTS 참여가 연구 대상의 자발적 동의와 철저한 보호를 핵심으로 하는 인류학자의 윤리를 위반하는 것은 물론, 연구 결과가 미군의 현실을 정당화하는 데 쓰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인류학회는 이미 지난 10월 이사회 성명에서 “HTS와 같은 인류학적 전문지식의 활용을 용납할 수 없다”고 반대의 뜻을 나타낸 바 있다. 미국인류학회는 또 미 군사주의의 영향력을 고려할 때, 전체 인류학자 및 그들의 연구 대상에까지 부정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도 우려했다.

전쟁과 인류학자의 ‘불안한 동거’는 20세기 미국 역사에서도 여러 차례 발견할 수 있다. 미국 인류학자들은 베트남전 때는 ‘피닉스 프로그램’을 통해 미군의 게릴라 소탕작전에 가담했고, 군사적 목적을 위장하고 칠레에 잠입해 내전의 가능성을 조사했다. 마거릿 미드나 ‘국화와 칼’의 저자 루스 베네딕트 등 거물급 인류학자들도 2차대전 당시 미군에 아시아 사회에 대해 조언하는 역할을 맡았다.

다시 문제는 이라크 전쟁
일부 인류학자는 아예 ‘보이콧’을 선언했다. ‘우려하는 인류학자 네트워크’(Network for Concerned Antrhopologists)를 결성한 산호세주립대학 로베르토 곤잘레스 교수는 “인류학이 서로 다른 사람들과 문화들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무기로 전락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류학자들의 강한 반대는 아프간·이라크 전쟁에 대한 반대와도 맞닿아 있다. 정부에 정책적 제안을 하고 건설적인 협력관계를 갖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정당성이 결여된 ‘잘못된 전쟁’에는 결코 참여할 수 없다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HTS 전문가 모집이 쉽지 않자 미 행정부는 자체적으로 인력 조달과 양성에 나섰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인재 풀이 턱없이 부족해 학계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이라크 HTS 팀원인 인류학 박사 마커스 그리핀은 자신의 블로그에 “베트남전쟁과 이라크전쟁의 유사성을 경험하며 좌절할 때가 많다. 그래도 과거보다 조금이나마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다”고 적기도 했다.

얼마 전에는 이라크 근무 발령을 통보받은 외교관들이 집단시위를 벌이는 소동이 빚어지기도 했다. 대다수 미국민이 돌아선 이라크전은 이제 학자들과 정책 결정자들마저 ‘수습’을 꺼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국제부┃김유진 기자 actvoic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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