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이일규 전 대법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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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민주화 토대’ 유산으로 남기다

[1000자 인물비평]故 이일규 전 대법원장

지난 12월 6일 대법원은 고 이일규 전 대법원장에 대한 법원장(法院葬)을 치렀다. 그간 개별법원 차원의 법원장은 있었지만, 대법원이 직접 법원장을 치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전 대법원장이 판사들에게 얼마나 특별한 인물이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지난 2일 별세한 이 전 대법원장은 1920년 12월 16일 경남 통영에서 태어났다. 1943년 일본 간사이대 법문학부를 중퇴한 후 1948년 변호사 시험에 합격, 1951년 판사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37년 동안 판사의 길을 걸었다. 그는 서슬 퍼런 군부독재정권 때 판사시절 대부분을 보냈다. 정보요원의 법원 출입은 예삿일로 통했던 그때, 군부정권은 재판마저 좌지우지하려고 애썼다. 그 시절, 이 전 대법원장은 소신판결을 위해 노력한 판사로 평가받는다. 그는 대법관으로 재직하면서 시국사범에 대한 중형선고에 10여 차례나 소수의견을 냈다.

특히 그는 1982년 당시 정보기관이 ‘기획해’ 올린 ‘송씨 일가 간첩사건’의 원심을 무죄 취지로 파기하면서 안기부를 경악케 했다. “불법구금 등 부당한 환경에서 작성한 검사의 피의자 신문조서는 믿을 수 없다”는 이유였다. 이 전 대법원장은 또 대법관 시절,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에서도 재판 절차에 문제가 있었다는 점을 들어 원심을 파기해야 한다는 소수의견을 냈다. 1981년 안기부가 송치한 재미교포간첩 사건에서는 무죄를 선고하기도 했다.

이러한 곧은 성품 때문에 그는 ‘통영 대꼬챙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자연히 후배들의 신망도 두터웠다. 그러나 고통도 따랐다. ‘송씨 일가 간첩사건’ 판결 이후에는 안기부가 그의 옷을 벗기기 위해 한 달여 간 미행한 사실이 최근 알려지기도 했다.
내적 고통도 적지 않았을 터다. “법률을 왜 배웠나 회의도 들었다. (판사가) 집권자의 보조 역할이나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서….” 이 전 대법원장은 경향신문과 인터뷰(1월 29일)에서, ‘긴급조치 시절’의 소회를 묻자 당시 괴로웠던 심정을 내비치기도 했다.

그래도 그는 행복한 판사였다. 고인은 1988년 대법원장에 취임했다. 재야에 있던 그는 정기승 대법관의 대법원장 임명동의안이 야당이 반대하여 헌정사상 처음으로 국회에서 부결된 후 임명됐다.

그는 대법원장이 된 뒤 ‘재판에 대한 외부의 간섭을 배격하고 법원민주화를 이룩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가 취임한 뒤 정보요원들은 더는 판사실을 상시로 출입하지 못했다. 그는 인신구속을 신중히 하고 적부심과 보석의 활용을 강조하는 등 인권옹호에도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지금의 법원이 영장발부에 신중하는 등 피의자의 인권을 위해 노력하는 것도 그가 남겨놓은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재판의 독립은 타인이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라 법관 자신이 정립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1990년 법관생활을 마감하면서 그가 남긴 말이다.

<송윤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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