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항 방사광가속기에서 뿜어져나오는 빛.
초기 성서의 원본인 사해문서(Dead Sea Scrolls), 혹은 베토벤이나 모차르트의 악보처럼 너무 낡아 파손될 위험이 있는 양피지 고문서를 건드리지 않은 채 내용을 판독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소식이 최근 외신을 타고 전해졌다. 지난 9월 12일 영국 요크에서 열린 과학 페스티벌에 참석한 영국 카디프 대학의 팀 웨스 교수에 따르면 태양보다 100억 배 더 밝은 광원에 의존하는 스캔 기술로 고문서를 투시해 내용을 읽어내려갈 수 있다. 광원은 입자가속기에서 나오는 X선 빔을 이용한 것으로, 판독 대상 문서는 입자가속기 빔(라인) 속에 놓여 천천히 돌려지면서 3차원 영상으로 찍힌다. 여기서 말하는 ‘입자가속기’란 원자핵을 구성하는 입자를 광속에 가깝게 가속시킬 수 있는 수㎞ 혹은 수십㎞에 이르는 원통형 모양의 장치를 말한다. 그 안에서 입자를 서로 반대반향으로 가속시켜 충돌시킴으로써 물질의 기본 구조를 밝혀낼 수 있는데 이 입자가속기를 국내에서는 1994년 12월 포항공대에 설치했다. 최근 일반인들 사이에 입자가속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은 가속기와 관련, 여러 가지 일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부산광역시 기장군 주민들은 고리 1호기 수명 연장 및 30년간 그린벨트로 묶여 있던 땅에 대해 정부 보상 차원에서 중입자가속기를 설치해줄 것을 강력히 요청해왔는데 도입 여부에 대한 확정이 계속 미뤄지자 원전 반대운동도 불사하겠다는 각오로 8만 명 서명운동에 돌입하는 등 대대적인 여론몰이에 나서고 있다.
‘4세대 가속기’ 순간출력 수백 억kw
한편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 후보는 지난해 말 유럽 시찰 중 유럽 26개 국이 참여, CERN연구소를 통해 스위스 제네바 부근에 설치 중인 세계 최대 규모의 입자가속기인 대형강입자가속기(LHC) 건설현장을 방문하고 이 같은 대형 가속기가 포함된 과학도시 건설을 공약으로 으로 내걸어 큰 주목을 받았다. 현재 포항에 있는 가속기는 전자총에서 쏜 전자를 길이 160m 길이의 선형가속기 속에서 전기장으로 자극해 빛 속도의 99.999999%로 가속시키는 능력을 갖고 있다. 이 선형 가속기에서 발사된 전자는 둘레길이 280m 원형의 저장링에서 10시간 이상 쉬지 않고 돌면서 방향을 바꿀 때마다 방사광을 뿜어낸다. 이 방사광은 빔라인을 통해 실험장치가 있는 곳까지 도달하는데, 그곳에서 다양한 관찰이 이루어지면서 고분자 태양전지 재료, 마이크로 의학용 로봇, 신약 개발 등의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과학 발전 vs 과잉투자’ 찬반 논란

포항 방사광가속기 빔라인.
그러나 포항 빛공장에서 만들어내는 방사광은 최근 선진국을 중심으로 설치하고 있는 가속기에 비해 빛의 밝기 면에서 큰 격차를 보인다. 포항의 가속기를 ‘3세대 가속기’라고 한다면 새로 건설 중인 가속기를 ‘4세대 가속기’라고 할 수 있는데, 4세대 가속기에서 방출되는 빛은 그 파장이 원자 크기 정도의 X선이고, 순간 최대 광 출력이 수백 억kw로 현재 포항에서 만들어내는 빛에 비해 10억 배 이상이 밝다. 이 ‘4세대 가속기’를 통해 물에서 수소가 떨어져나오는 과정을 상세히 관찰할 수 있어 수소연료 등 대체에너지 개발이 가능하고, 단백질 구조 분석을 통해 신약 개발 및 유전공학 연구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관계자들은 설명한다. 더 큰 관심을 끄는 것은 ‘4세대 가속기’가 갖고 있는 레이저 특성, 짧은 파장, 강력한 밝기, 빠른 펄스 등의 특성으로 인해 극미 세계를 연구하는 ‘나노과학’과 극 초단의 빠른 세계를 연구하는 ‘펨토과학’을 동시에 가능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노(10억 분의 1m)를 넘어 펨토초(1000조 분의 1초)에 일어나는 현상을 규명했을 때 지금의 과학이 어느 수준으로 발전할지는 독자들의 상상에 맡겨야 할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현재 건설하고 있는 ‘4세대 가속기’를 과연 성공적으로 가동할 수 있느냐다. 그동안 미국 스탠포드 선형가속기 연구소(SLAC), 스위스 CERN, 독일 DESY연구소, 일본 SPring-8연구소 등이 ‘4세대 가속기’ 건설을 추진 중이거나 시작하고 있지만 완공은 아직 더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다. 이 같은 분위기에서 ‘4세대 가속기’ 건설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4세대 가속기’가 건설될 경우 지금보다 훨씬 더 미세한 초입자들을 연구함으로써 우주생성의 비밀은 물론 과학 각 분야에서 큰 진전이 있을 것은 틀림없지만 가속기가 실질적인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수십 년의 세월이 더 필요하고, ‘4세대 가속기’가 할 수 있는 역할 또한 순수한 기초학문 분야기 때문에 막대한 투자에 비해 그 성과가 매우 적어 보인다는 것이다. 즉 가속기를 상용적으로 응용할 수 있는 차원의 기술로 연결시키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반론도 만만치 않다. 특히 극미세계를 더 자세히 들여다보려고 애쓰고 있는 화학, 생명공학자들은 ‘4세대 가속기’만 있다면 이전보다 훨씬 손쉽게 첨단 연구 결과를 얻을 수 있다며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4세대 방사광이 만들어진다면 미세하면서도 강력한 방사광을 통해 이전에 하지 못했던 화학 반응이 가능해지고, 분자 내 원자의 위치와 활동을 함수로 나타낼 수 있어 결과적으로 혁명적인 연구 결과가 속출할 것이라는 것이 이들의 예상이다.
한편 세계 3위급의 2.5 GeV 전자선형가속기를 보유하고 있는 포항가속기연구소 측에서는 이 선형 가속기를 한국 기술로 자체 제작했으며, 지난 10년간 끊임없이 성능을 개선해온 경험이 있어 지금까지의 기술을 활용하면 ‘4세대 가속기’ 개발기간을 단축하고, 1000억 원에 이르는 건설 예산도 크게 절감할 수 있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누구의 주장이 옳던 간에 이미 세계 주요 국가들이 ‘4세대 가속기’ 건설을 시작하고 있으며, 1994년 12월 유럽연합, 미국, 이탈리아, 대만에 이어 세계 5번째로 빛 공장을 완공한 바 있는 한국에서도 ‘4세대 가속기’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처지이다.
이강봉〈사이언스타임즈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