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초등학교에 어린이도서관을”
지금 교육환경이 아이들 행복 침해 공감… ‘삼포’로 내몰린 학생들에 사회적 관심을
“학교 선생님이 사교육시키라고 말하는데 안 할 수 있나.”
어느 때보다 열띤 토론이었다. 지난 8월 10일 충무로 KYC 사무실에 모인 학부모, 학교 교사, 학원 선생님 들은 할 말이 많았다.
먼저 학부모들은 사교육을 시킬 수밖에 없는 현실을 지적했다. 한 학부모는 학교 선생님에게 (초등학교 1학년의) 영어교육 대비방법에 대해 묻자 대번에 “사교육을 왜 안 시키냐”는 답변이 돌아와 당황스러웠다고 말했다. 학교 선생님들조차 당연시하는데 어떻게 사교육을 무시할 수 있겠느냐는 것.
참석자들은 지금의 교육이 아이들의 행복을 빼앗아가고 있다는 데 공감했다. 일부 참석자들은 대안으로 공교육과 공공문화서비스를 들면서 국가가 재정투자를 과감하게 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한 참석자는 "음악·미술 등 방과후 활동을 세심하게 챙겨주는 학교를 찾기 위해 이사했고, 지금 만족한다"고 말했다. 일부는 ‘어린이도서관’을 튼실하게 운영했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내놨다.
참석자들은 또 사교육 과열이 대학입시에 목매야만 하는 사회구조에서 비롯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부모가 “대학입시보다 아이의 다양한 재능을 발굴하는 데 노력해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나온 것도 그 때문. 또 입시 위주의 교육 속에서 소외되고 있는 청소년들, 이른바 삼포(학업·대학·인생 포기)로 내몰리는 이들에 대해서도 사회적인 관심이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사회(정보연): 우리 생활 속에 사교육이 얼마나 파고들었는지 그 실상을 먼저 이야기했으면 좋겠다.
박세종: 경기도의 모 고등학교에서 논술강의를 한 적이 있다. 학교 교사가 직접 논술을 가르치지 않고, 우리 같은 강사를 부르는 것을 보면, 공교육 속에도 이미 사교육이 녹아 들어가 있는 것은 아닌지.
송운경: 저는 3만 원 정도의 수강료를 받고 학교에서 특기적성 수업을 하고 있다. 사실 별로 대접도 못 받는다. 우리 아들은 저를 보고 ‘싸구려 강사’라고 놀리기도 한다(모두 웃음). 엄마들도 학교에서 하는 ‘방과후 수업’은 한두 번 결석해도 걱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조차 아들이 30만 원짜리 영어수업을 빠지면 꼭 학원에 전화해서 다시 수업을 들을 수 있도록 챙기는 편이다. 돈이 아깝다는 생각 때문이다.
한혜숙: 큰 아이의 입학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교감선생님께 ‘내년부터는 초등학교 1학년부터 영어교육을 시작한다는데, 어떻게 준비하면 좋을지’ 물어 보았다. 사실 저는 ‘영어에 거부감이 없어지도록 영어 테이프나 들려주면 나머지는 학교에서 책임지겠다’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하지만 교감선생님의 말이 가관이었다. “아니 어머니 왜 (사교육) 안 시키세요. 조기 교육 있잖아요.” 그런 말을 듣고 내가 어찌 사교육을 안 시킬 수가 있겠나.
박세종: 저는 사교육을 꼭 나무랄 이유는 없다고 본다. 공교육도 입시 위주의 교육을 하지 않나. 오히려 사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사고력도 높다.
이광훈: 현재 강남 학원가에 창의력·사고력을 높이기 위한 학습프로그램이 있긴 하다. 하지만 그런 사교육들은 아이들이 잘 소화할 수 있도록 씹어서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면 오히려 아이들의 학습능력이 저하될 수 있다.
정주영: 우리 아이는 사립학교를 보내려고 했다. 방과 후 학원을 전전하는 것보다 (사립)학교에서 음악·미술까지 ‘원스톱’으로 해결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이가 사립학교 시험에 떨어졌고, 궁리 끝에 방과 후 활동까지 한번에 해결할 수 있는 학교를 찾아 이사를 갔다. 지금 우리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는 형편이 어려운 가정이나 한부모 가정의 자녀가 많이 다니는데, 교육지원도 많고 아이 보호에 대한 배려가 많아 만족한다. 사교육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학교를 바꾸어 나가는 게 좋은 대안일 수 있다. 무엇보다 학교 선생님들의 능력과 위상을 높이는 것이 바람직하다.
박세종: 공교육을 살리기 위해서는 과감한 투자가 필수다. 예를 들어 구립·시립도서관의 어린이도서관은 초등학생을 상대로 도서관을 운영하는 업체와 비교하면 질적으로 차이가 크다. 아이들은 당연히 공공도서관보다 고급스러운 ‘도서관업체’를 선택하게 마련이다.
오형준: 정말 도서관은 많이 늘어나야 한다. 아내는 아이들을 도서관에 데리고 가는 것이 가장 좋은 사교육인 것 같다고 하더라. (어린이도서관을 확충하기 위해서는) 공간과 재정이 부족하다고 하는데, 초등학교는 많은 곳에 있잖나. 모든 초등학교에 어린이도서관을 만들면 쉽게 꾸밀 수 있고 찾아가기도 편할 것 같다.
김수경: 공적인 영역에서 새 시대의 교육을 뒷받침하는 서비스가 많이 늘어나야 한다.
오형준: 한국학원총연합회라는 단체가 ‘방과후 학교’ 제도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국회의원들에게 로비를 하고 있다고 들었다. 걱정이다.
김수경: 부모들이 아이들에겐 너무 고통스러운 세상을 만든 거다. 아무리 발버둥쳐봤자 3%만 소위 일류대에 입학할 수 있다. 다들 ‘내 아이는 관리하면 그 안에 들 수 있겠지’ 하는 욕심을 부리는 것 같다. 잡을 수 없는 불나방을 쫓고 있는 건 아닌지. 그 노력, 그 비용을 아이들이 사회에서 제몫을 할 수 있도록 다양한 재능을 찾아주는 데 써야 한다. 저는 고교 교사지만 우리 아이는 과외도 안 시키고… 그렇게 교육시킬 생각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밝히면 다들 왕따 취급을 한다. “너도 애가 중학교 들어가면 다를 거야”라고 말한다. 다같이 미치기를 원하는 거다. 우린 강박적인 사고의 틀 안에 갇혀 있다.
박세종: ‘삼포’라는 말을 들어 보셨는지? ‘ 학포’는 학업 포기, ‘대포’는 대학 포기, ‘인포’는 인생 포기다. 이런 학생들을 위해 교육이 존재해야 하는데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다.
김수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혁명적인 제도 변화가 필요하다. 이를테면 서울대 하나만 최고로 만들지 말고 지방의 여러 국·공립대학을 최고로 만들면 어떤가. 정책을 이행하려는 의지만 있다면 할 수 있다고 본다.
정은미: 대안학교에서 일하고 있다. 앞서 ‘대안학교형 학원’(창의력·사고력 증진 등 대안학습 프로그램을 활용하는 학원)에 대한 말씀을 하셨다. 그런 학원들 때문에, 대안학교가 ‘귀족학교’라는 비판을 더 받는 것 같다. 대안학교에서 대안교육을 제대로 할 수 있으려면, 법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본다. 대안학교 관련 시행령이 공고됐는데, 내용이 공교육법안에서 용어만 조금 바꾼 정도다. 대안교육 현장의 목소리를 시행령에 담으려는 노력을 했으면 좋겠다.
박세종: 무엇보다 ‘공정한 경쟁’이 중요하다고 본다. 다양한 계층에 대학의 문을 열어놓으려면 기여입학제, 고교등급제, 논술고사는 반드시 금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또 교육정책이 점차 특목고 위주로 변화하고 있다고 느끼는데, 수정해야 한다고 본다.
참석자
박세종 ▶ 남·36·학원 논술강사·서울 노원구·여 7세
송운경 ▶ 여·39·프리랜서 강사·경기 일산·남 12세
오형준 ▶ 남·38·입시학원 직원·서울 성북구·남 6세·3세
이광훈 ▶ 남·34·회사원(학습지)·경기 김포시·여 5세·남 2세
정은미 ▶ 여·28·대안학교 교사·서울 노원구
정주영 ▶ 여·36·유학원 대표·서울 송파구
한혜숙 ▶ 여·32·전업주부·경기 부천·남 7세, 남 5세
김수경(가명) ▶ 여·34·고등학교 교사·서울·여 6세, 남 3세
진행·정보연〈KYC 대표〉
<정리·송윤경 기자 kyung@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