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즈 퍼뜨린 혐의자 8년 만에 ‘집으로’… 리비아는 ‘보상금’등 경제적 지원 약속받아
유럽과 리비아가 8년 이상 끌어오던 외교 분쟁이 막을 내렸다. 리비아는 7월 24일 1999년 체포한 불가리아 간호사 5명과 팔레스타인 출신 의사 1명을 전격 석방,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이 같은 결말은 유럽연합(EU) 측엔 외교적 승리를, 리비아엔 경제적 실리를 뜻한다. 특히 2003년 대량살상무기(WMD) 개발 계획을 포기한다고 선언하면서 미국과 관계를 개선한 리비아는 이번 결정을 통해 EU와 관계를 정상화할 수 있게 됐다. EU가 석방의 대가로 경제 지원과 교역 활성화를 약속하면서 리비아는 경제 성장을 도모할 발판을 마련했다.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는 8년간 고집해온 자존심을 포기하는 대신 실리를 선택한 셈이다.
8년 만의 귀향
불가리아 간호사 5명과 팔레스타인 출신 의사 1명은 24일 프랑스 대통령 전용기에 올랐다. 8년 동안 수감생활을 했던 리비아를 떠나 불가리아로 떠나는 길이다. 비행기에는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의 부인인 세실리아 여사와 베니타 페레로 발트너 EU 대외관계 담당 집행위원장이 동승했다.
이들은 오전 9시 45분(현지시간) 불가리아 수도 소피아 공항에 도착해 활주로까지 마중 나온 가족들의 품에 안겼다. 간호사 스네즈하나 디니트로바는 사랑하는 가족들과 다시 만난 뒤 “이 순간을 정말 오랫동안 기다려왔다”고 소감을 밝혔다.
게오르기 파르바노프 불가리아 대통령은 도착 즉시 이들을 사면했다. 팔레스타인 출신 의사는 지난 6월 이미 불가리아 시민권을 받은 터였다. 이바일로 칼핀 외무장관은 성명을 내고 이번 사면이 의료진들의 무고함에 대한 확신에 따른 것이고 대통령은 헌법상 권리를 이행했다고 말했다. 대통령실도 성명을 내고 무고한 불가리아 시민들이 사형선고를 받는 드라마 같은 일은 끝났다고 강조했다.
‘드라마 같은 일’은 199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불가리아 간호사들은 임금 조건이 더 나은 일자리를 찾아 가족을 남겨둔 채 리비아로 떠났다. 이들은 한 구인업체의 소개를 받고 리비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 벵가지에 있는 어린이 병원에 취직했다.
그러나 ‘리비안 드림’은 없었다. 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어린이 438명이 에이즈를 유발하는 HIV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실이 드러난 게 발단이었다. 리비아 당국은 외국인 의료진들이 고의로 오염된 혈액을 어린이들에게 수혈했다고 주장하며 같은해 2월 이들을 구속했다. 악몽의 시작이었다.
2004년 5월 리비아 법원은 팔레스타인 출신 의사를 포함해 6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이들은 구타와 전기 충격 등 고문을 못 이겨 거짓으로 혐의를 인정했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사연이 알려지면서 국제 인권 단체들과 EU는 본격적인 구명운동을 벌였다. 에이즈 전문가들은 HIV 감염에 대해 병원의 위생 상태가 불량한 탓이라며 의료진들의 무죄를 호소했다.
노력은 모두 무위로 돌아갔다. 리비아 최고법원은 7월 11일 사형을 확정했다. 나흘 뒤 피해자 가족들이 보상금으로 4억 달러를 받겠다고 결정하면서 17일 형량이 종신형으로 감형된 게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러나 사건은 1주일 만에 급반전됐다. 카다피 국가원수가 추방 형식으로 이들을 풀어주기로 한 것이다. EU와 리비아 간에 모종의 거래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실리 택한 카다피
이번 석방 결정은 리비아의 개방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리비아는 2003년 WMD 개발을 포기하기로 결심하면서 지난해 5월 미국과 외교관계가 전면 복원됐다. 30년간 일종의 ‘우리식 사회주의’를 고집하며 닫아걸었던 문을 열어젖힌 것이다.
1969년 27살의 나이에 무혈 쿠데타로 집권한 카다피는 1977년 인민위원회가 통치하는 자마히리야 체제를 선포했다. 사회주의와 이슬람주의, 범아랍주의 등을 종합한 자신의 저서 ‘그린 북’에 기초해 완성한 통치체제다.
카다피의 사회주의 실험은 부작용을 남겼다. 산업 인프라는 시대에 뒤쳐져 있고 교육과 의료 서비스도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서방은 리비아가 대 서방 테러를 배후 지원했다며 국제적으로 고립시켰다. 1988년 팬암기 폭파 사건과 이에 따른 1992년 유엔의 경제 제재로 경제난이 가중됐다. 손실액이 235억 달러에 달했다.
결국 카다피는 1999년 팬암기 사건의 용의자를 유엔에 인도하면서 유엔의 경제 제재에서 벗어났다. 이후 개혁·개방정책을 추진하며 경제 회생을 꾀했다. 미국이 리비아를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하면서 리비아는 경제적 도약의 기회를 맞았다.
하지만 서방과의 구원(舊怨)이 말끔히 씻긴 것은 아니었다. 불가리아 의료진을 붙잡아두고 있는 한 유럽과의 관계 개선은 요원했다. 자존심을 버려야 살 수 있었다.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전면에 나선 것은 카다피의 아들 사이프 알 이슬람이었다. 그가 운영하는 ‘카다피 재단’은 피해 어린이의 부모와 리비아 정부를 대신해 EU와의 보상 협상을 맡아왔다.
AFP통신에 따르면 EU 집행위원회는 불가리아 의료진 구명을 위해 설립한 기금에서 약 4억6100만 달러를 지급하기로 했다. 석방 대가로 감염된 어린이당 약 100만 달러를 지불하는 것이다.
이미 피해자 가족 중 일부는 고급차를 사거나 어린이 병원에 기부하는 등 보상금을 수령해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페레로 발트너 집행위원장은 “이것은 8년 반 동안 감옥에 있던 사람들의 생명에 관련된 것”이라며 이 액수는 지나친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EU가 리비아에 주기로 한 것은 이뿐이 아니다. EU는 리비아가 병원을 비롯한 기반시설을 확충하도록 지원하기로 했다. HIV에 감염된 어린이들에겐 평생 치료를 제공한다. 리비아로서는 선심 쓰고 선물까지 받는 1석 2조의 거래다.
그러나 이 같은 협상 내용에 대해 비판도 없지 않다. 유럽 언론들은 EU 협상 대표들이 공갈에 굴복해 청부 살인자에게 사례금을 건넸다고 비난했다.
석방 직전 리비아를 두 차례나 방문한 세실리아 사르코지 프랑스 영부인도 구설수에 시달리고 있다. EU 외교관들은 “외교 경험도 없는 세실리아가 EU가 수년간 쏟아부은 노력의 성과를 한순간에 가로챘다”며 “이는 ‘미션 하이재킹’이다”라고 반발했다.
<최희진 기자 daisy@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