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강타한 영국 차량폭탄 사건, 기존 ‘테러에 관한 일반 상식’ 뒤엎어
근래 ‘테러주의보’가 또 다시 세계를 강타했다. 지난달 영국 런던과 글래스고에서 잇따라 들려온 차량폭탄 테러 소식 때문이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2년 전 런던 시내의 지하철역과 버스 등에서 52명의 희생자와 700여 명의 부상자를 낳았던 7·7테러의 공포스런 기억을 되살리기엔 충분했다. 10년 만에 물러난 토니 블레어의 뒤를 이어 노동당의 노련한 행정관료 고든 브라운이 총리직에 오른 직후인데다, 행운의 777데이를 앞두고 있어 파장은 더욱 컸다.
서구 문명 혹은 자본주의 세계의 ‘심장’이 테러의 ‘타깃’이 된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미국의 이라크 전쟁에 ‘충성스런’ 동반자로 참여한 ‘원죄’를 안고 있는 영국은 당분간 본토에서 강도 높은 ‘테러와의 전쟁’을 벌여야 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라크와 레바논에 전투병을 파병한 한국도 테러는 임박한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영국발 테러 미수 사건이 남긴 시사점들을 짚어본다.
같으면서도 다른 패턴 지난 6월 29일과 30일 런던의 나이트클럽과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공항에서 하루 간격으로 일어난 두 건의 테러 미수 사건.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주동했고 직접 제조한 폭탄을 썼다는 점 등은 기존의 테러 모의들과 흡사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조금 다른 점이 눈에 띈다. 우선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영국 내에서 차량폭탄 테러를 시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미국의 한 일간지는 이를 두고 “바그다드가 영국에 왔다”고 표현했다. 매일 수십~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오늘날의 이라크는 차량폭탄 테러의 온상이기 때문이다. 용의자들이 번듯한 전문직 종사자-영국 국민의료시스템(NHS)에 합법적으로 고용된 의사-들이었다는 사실도 과거와 확연히 구분되는 점이다.
테러의 본질이 바뀐 것일까? 미 시사주간지 ‘타임’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변모해가면서 선입관을 흔들어놓는 것이 바로 테러리즘의 속성”이라고 평가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테러의 성격도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생명력을 지속해간다는 것이다. 파괴적인 인명살상과 강력한 메시지 전달 및 이를 통한 정치·경제적 목적 달성이라는 기본 목표를 가지고 있는 테러의 특성상 종전의 수법 등을 모방하는 경우는 있어도 완전히 복제된 테러가 출현할 소지는 높지 않다.
진화를 거듭하는 테러에서 뜻밖의 유사성을 찾기도 한다. 미국 메릴랜드대 전국 테러리즘연구 컨소시엄은 1970년부터 최근까지 전 세계 756개의 차량폭탄 공격 중 101개가 영국에서 발생했다고 밝혔다. 북아일랜드 무장 독립투쟁을 전개한 아일랜드공화군(IRA)은 차량폭탄을 ‘애용’했다.
테러보다 더 위험한 고정관념들 타임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테러에 관한 ‘일반 상식’이 잘못된 가정에 기초하고 있음이 드러났다고 지적했다. 교육이나 소득 혹은 국적·인종과 같은 ‘객관적인’ 지표들로 테러 용의자를 판별하고 분석해내는 현재의 테러 대응 방식도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교육수준이 낮을수록 테러 가담 확률도 높을 것이라는 일반의 인식과 달리, 이 사건 용의자의 상당수는 소위 ‘사회 지도층’인 의사들이었다. 오사마 빈 라덴의 핵심 참모 아이만 알 자와히리도 직업이 의사다. 지식인일수록 테러에 적극적으로 나선다는 분석도 나왔다. 어설픈 테러 수법도 함정에 빠뜨리는 요인이 될 수 있다. 단순한 장치였다고 해도 폭탄이 성공적으로 터졌다면 그 피해는 어마어마하다.
테러 용의자들이 영국 ‘토종’(homegrown)인지 또는 ‘외래종’(imported)인지 여부를 따지는 것도 의미가 없어졌다. 정부가 특정 집단을 테러 단속의 표적으로 삼을 경우, 오히려 감시망 밖에 있는 집단에까지 테러 행위가 번질 우려가 크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글래스고 테러 용의자 중 한 명이 인도 출신 모슬렘이라는 점이다. 미·일 간 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는 인도 모슬렘이 국제 테러에 연루된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전통적으로 이슬람 급진주의 세(勢)가 약한 것으로 알려진 인도에서도 군사적 이슬람이 부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용의자들과 알카에다의 직접적인 연계 여부에 대해서는 수사 중이다. 다만 기소된 글래스고 테러 용의자인 빌랄 압둘라(이라크 출신 의사)를 비롯해 다른 이들도 이라크 상황에 불만이 컸던 것으로 밝혀졌다. 현재로서는 이들이 내전에 빠진 이라크의 현실을 보면서 알카에다식의 ‘반미 항전’ 구호에 자발적으로 설득당해 급진화의 길을 걸었다는 시나리오가 유력하다. 이 경우, 이라크 상황이 획기적으로 개선되지 않는 한 테러 공포가 지구촌을 계속 위협할 수 있다.
테러와 함께 살아가기 브라운 총리와 신임 내각은 국정운영 첫 시험대를 무난하게 통과한 것으로 보인다. 브라운은 평소 과묵한 스타일답게 차분한 리더십을 보여줬다는 평이다. 블레어가 7·7테러 당시 “문명에 대한 위협” 등 자극적으로 발언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브라운은 “테러는 명백한 범죄”라고 정리하고 뒷수습에 나섰다. 첫 여성 내무장관 재키 스미스도 능숙한 대처로 호평을 받았다.
영국 정부는 사건 발생 4일 만에 8명의 용의자를 체포하고, 5일째에 테러 경보 단계를 낮췄다. 일부에서는 이 같은 발빠른 대응이 런던의 감시카메라(CCTV) 네트워크 때문에 가능했다고 주장한다. 뉴욕은 런던을 본떠 2008년 말까지 테러방지 목적의 CCTV 3000여 대 이상을 맨해튼 지역에 설치하기로 했다.
그러나 ‘실패한’ 테러도 테러다. 사후조치가 훌륭했다고 해도 테러 예방에는 못 미친다. 이코노미스트는 “사상자가 없었던 것은 상당 부분 운(luck)과 함께 경찰의 적절한 대응 및 정보 활동 덕택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해마다 찾아오는 ‘불청객’ 테러와 함께 살아가는 법을 터득해가고 있는 영국인들. 그중에서도 영국의 160만 모슬렘 사회가 느끼는 불안은 유독 크다. 안보장관이 “영국 내 무슬림 역시 테러 피해자”라고 테러 용의자들과 모슬렘 공동체 사이의 선을 그었지만, 이슬람 테러가 하나씩 터질 때마다 모슬렘들이 놓여 있는 제도적 제약과 사회적 편견 등 유·무형적 차별의 수위도 상승한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당장 이번 사건의 용의자들과 비슷한 숙련 이주노동자들에게는 비상이 걸렸다. 총리의 지시로 이들에 대한 배경 조사가 강화되면서 이주와 취업, 정착의 공간이 현저히 위축될 것으로 보인다.
<국제부|김유진 기자 actvoice@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