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민 한나라당 의원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윗사람을 자기 스타일로 만드는 ‘책사’

한나라당 유승민 의원은 이회창 전 총재의 책사 역할을 할 때까지는 ‘유수호(13·14대 의원)의 아들’로 통했다. 아버지의 정치적 그늘이 그만큼 짙었던 것. 이 때문에 원로급 정치인들은 유 의원에 대해 “아버지를 닮아 통이 크다” “아버지의 기품과 의리를 이어받아야 한다”는 등의 얘기를 들었다.

<일러스트 김영민>

<일러스트 김영민>

유수호 전 의원의 기품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 한 가지. 1993년 11월 슬롯머신 사건으로 구속된 박철언 전 의원의 1심 변론을 맡은 유수호 변호사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정치보복을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재판정 사상 처음으로 변호사가 퇴청명령을 받았다. 그것도 맏아들인 유승정 판사의 친구로부터.

유승민 의원도 그런 아버지의 기질을 이어받았다. 유승민 의원은 1976년 대입 예비고사에서 전국 차석을 차지했던 수재였다. 그는 전혀 공부하는 티를 내지 않았다고 한다. 경북고 동기인 김희락 여의도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고교재학 중에 술을 마시고 담배도 피우는 등 모범생 행세는 전혀 안했다”면서 “한 친구가 대입 스트레스로 가출을 했는데 그와 동조해서 동반가출을 했던 일도 있다”고 말했다. 김 선임연구위원은 “유 의원이 그렇게 잘 사는 줄은 고교재학 중에 전혀 몰랐다”고 덧붙였다.

그의 정치입문은 전격적이었다. 그가 KDI연구위원으로 있던 2002년 당시 이회창 총재는 그를 한나라당 산하 연구기관인 여의도연구소장으로 전격 기용했다. 2002년 봄은 박근혜 의원이 당내 민주화를 주장하면서 이회창 총재에게 대항하다가 결국 탈당했던 무렵이다. 당시 여의도연구소장인 유승민 의원은 이회창 전 총재에게 반기를 든 박근혜 의원의 대항카드를 제작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일설에 따르면 박근혜의 X파일을 준비했다는 얘기도 있다.

복당한 박근혜 의원이 대선 패배 이후 고사 직전의 한나라당을 이어받으면서 자연스럽게 박근혜 사람으로 넘어가게 됐다. 주변으로부터 비서실장으로 유 의원을 추천받은 박근혜 대표는 한때 정적의 최측근 참모를 역임했던 그를 두말 없이 끌어안았다. 물론 유 의원은 고사했다. 유 의원은 “박 대표와 고집싸움에서 졌다”고 말했다. 유 의원을 잘 아는 한 인사는 “유 의원은 윗사람을 보좌해서 자기 스타일로 만들어가는 스타일”이라면서 “그렇다고 절대로 아첨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박근혜 전 대표가 비례대표였던 유 의원을 지난해 4월 보궐선거에서 당선시켰다. 측근인사 봐주기라는 당내외 비난을 무릅쓴 도박이었다. 그것도 상대는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의 일등공신이었던 이강철 전 청와대 시민사회수석.
그는 ‘박근혜의 책사’로 공고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사실상 그는 한나라당 후보경선에서 박근혜 캠프의 전략기획을 책임지고 있다. 공교롭게도 박근혜 전 대표의 경쟁자인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책사인 정두언 의원과는 서울대 상대 동기동창이다. 그들의 지략싸움이 더욱 관심을 갖게 하는 이유다.

<김경은 기자>

1000자 인물비평바로가기

주간경향 댓글 정책에 따라
이 기사에서는 댓글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이미지
탄핵 이후 준비해야 할 것들
오늘을 생각한다
탄핵 이후 준비해야 할 것들
밤새 뒤척인다. 겨우내 마음 편히 잠을 자지 못해 머리에 스모그가 낀 듯 무겁다. 창밖을 보니 눈이 내린다. 이상기온이 일상이 돼간다. 기후변화의 징후인 3월 중순 눈 쌓인 풍경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고 불길하다. 자연 시스템의 불안정성만큼이나 정치와 사법 시스템 또한 아슬아슬하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둘러싼 사회적 긴장은 한국 민주주의가 직면한 불안정성을 드러낸다. 일만 년간 이어온 기후 안정성과 40여 년이 채 안 된 한국의 민주주의는 기간으로는 비할 데 아니지만, 우리 삶에 당연히 주어지는 조건으로 여겨졌던 점은 흡사하다. 이번 겨울 기후환경이든 정치체제든,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것들이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 여실히 드러났다. 기후위기와 정치위기라는 무관해 보이는 두 위기는 사실 그 원인 면에서도 맞닿아 있는데, 효율과 성과가 최우선시되는 과정에서 다른 중요한 가치는 간과했다는 점이다. 한국사회는 산업화하는 과정에서 빠르게 성장하는 법을 배웠지만, 화석 연료 중심의 에너지 구조를 전환하는 데 게을렀고, 정치적 다양성과 세대 간의 이해를 구현하지 못했다. 우리는 경쟁을 통해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지만, 이제는 그러한 방식의 성장이 우리 사회를 갉아먹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