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헌법 제정 ‘獨·佛연합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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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나라 ‘미니 조약’ 추진 견인차 역할… 폴란드·영국 등 반대국가 설득도 앞장

유럽연합(EU)이 고유명사가 된 이후로 짧지 않은 세월이 흘렀지만 유럽 통합 프로젝트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단일 화폐 유로를 도입하면서 경제통합은 이뤘으나 정치·군사통합은 미완의 상태다. 통합의 최종 형태가 유럽연방이 될지, 유럽합중국이 될지 장담할 수 없다. 통합을 현 수준에서 멈추고 EU로 남을 가능성도 있다.

유럽의 미래를 예상해볼 수 있는 방향타 중 하나가 유럽헌법이다. 헌법이 국가의 통치원리를 규율하는 법이라고 했을 때, 유럽헌법은 대륙의 이름 유럽이 아닌 한 국가로서의 유럽을 전제로 한다.

일부 EU 회원국들이 유럽헌법의 채택을 주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프랑스인, 영국인, 혹은 독일인의 정체성을 버리고 ‘유럽인’이 될 것인가. 프랑스와 네덜란드 시민들은 2005년 이 질문에 ‘아니오’라고 답했다. 두 국가의 국민투표는 부결됐고 EU는 본의 아니게 숨 고르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2년이 흐른 2007년 6월 21일, EU는 이틀 일정의 정상회의를 열고 헌법 부활이라는 의제를 다시 테이블 위에 올렸다. 통합의 수준을 심화할 것인지 아닌지 EU 회원국들은 대답해야 한다.

조약으로 한발 양보

EU 순번 의장국인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헌법 부활에 대한 열의가 남다르다. 우선 독일은 1952년 EU의 모태인 유럽석탄철강공동체가 탄생하던 때부터 프랑스와 함께 통합의 견인차 역할을 해왔다.

의장국 임기가 끝나기 전에 기념비적 성과를 남기고 싶다는 메르켈 총리의 욕심도 작용하고 있다. 메르켈 총리는 정상회의 첫날 “많은 사람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며 “너무 오래 끌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회원국들에 당부했다.

이 회의의 토론 대상은 메르켈 총리가 6월 19일 공개한 11쪽짜리 헌법 초안이다. 초안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헌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헌법의 경우, 회원국들이 국민투표를 실시해야 한다는 부담이 크기 때문이다. 어느 한 국가에서라도 부결되면 EU는 또 한 번 정치적으로 타격을 받는다.

EU 정상들이 생각해낸 묘안은 ‘미니 조약’이다. 기존 EU 창설 조약을 개정하는 형태다. 헌법으로 바로 가는 것을 꺼리는 회원국들을 설득하기에도 나쁘지 않다.

이에 따라 2005년 부결된 헌법 조항 중 EU에 국가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으로 해석될 내용은 미니 조약에서 삭제될 전망이다. 국가(國歌)와 국기, 국내법에 대한 EU법 우선 원칙 등에 관한 조항들이다.

반면 대통령과 외무장관직 신설, 이중다수결 제도 도입 등은 포함된다. 다만 일부 회원국이 외교정책 주도권을 EU에 양도하는 것을 원하지 않아 외무장관직의 이름과 역할은 조정될 수 있다.

현재 메르켈 총리의 든든한 우군은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다. 이번 정상회의로 EU에 데뷔하는 그는 주요 국가를 미리 방문하거나 전화를 걸어 헌법 논의에 협조해달라고 촉구하는 등 지원 사격을 아끼지 않고 있다.

국민투표의 부담을 덜기 위해 미니 조약의 아이디어를 제시한 사람도 그다. 2년 전 자국의 국민투표에서 헌법이 부결됐다는 부담감에서 벗어나 독일과 함께 강력한 통합 리더십을 다시 구축하겠다는 계산이다.

폴란드와 영국이 변수

메르켈 총리는 27개 회원국 중 23개국이 초안에 찬성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공개적으로 반대 의사를 밝힌 나라는 폴란드, 영국, 체코, 네덜란드다. 독일은 네덜란드와 체코를 설득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문제는 폴란드와 영국이다.

영국이 유럽통합에 회의적이라는 것은 새삼스러운 이야기가 아니지만 2004년 EU에 정식 가입한 폴란드의 반대는 기존 회원국들을 당혹스럽게 하고 있다. 한 외신은 폴란드가 영국을 제치고 최강의 트러블메이커로 떠올랐다고 비꼬기도 했다.
폴란드가 극렬 반대하는 조항은 이중다수결 제도다. EU의 복잡한 의사결정구조를 단순화하기 위해 역내 인구의 65% 이상과 27개 회원국 중 15개국 이상이 찬성하면 의결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폴란드는 이 제도가 인구가 많은 국가, 특히 독일(약 8300만 명)에 유리하다며 반발하고 있다. 레흐 카친스키 대통령은 “죽을 각오를 하고 있다”며 배수진까지 쳤다.

야로슬라브 카친스키 총리는 폴란드 공영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우리가 빼앗긴 것을 되찾겠다는 것뿐”이라며 “만약 폴란드가 1939~1945년 점령기를 겪지 않았다면 오늘날 인구 규모는 6600만 명에 이를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치 독일에 폴란드 국민이 많이 죽었으므로 폴란드는 인구보다 더 많은 의결권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현재 폴란드 인구는 약 3800만 명이다.

폴란드의 이 같은 행보가 독일의 정치적 승리를 방해하기로 작심한 것이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안데르스 포그 라스무센 덴마크 총리는 “의결권 제도에 관한 결정을 내리는 근거에 제2차 세계대전이 깔려 있다는 것은 터무니없다”고 폴란드를 비난했다.

영국의 반대도 만만치 않은 수준이다. 영국의 주권을 EU로 양도할 수 없다는 게 영국의 기본 입장이다. 후임 총리인 고든 브라운 재무장관에게 국민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토니 블레어 총리가 악역을 도맡은 측면도 간과할 수 없다. 블레어 총리는 영국 일간 더 타임스와 인터뷰에서 “EU의 헌장이 영국 국내법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며 “영국의 외교정책과 사법제도, 조세, 사회보장 제도 등에 대한 통제권을 EU에 넘길 수 없다”고 밝혔다.

영국은 특히 인간·시민·사회적 권리를 명시한 EU 기본권리헌장이 조약에 명시돼 법적 구속력을 갖는 것에 반대하고 있다. 노동자의 파업권과 질병예방권 보장 등 기업이 반발하는 조항을 포함하고 있어서다. 영국은 이 헌장을 비롯해 경찰·사법 분야 공조에 참여하지 않을 수 있는 ‘옵트 아웃’ 등 4개 항의 예외를 인정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독일은 다른 국가들과 공조해 폴란드를 압박하고 영국에 일부 예외를 주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 외신들은 EU 정상들이 일부 조항에만 합의하는 식으로 회의 결렬을 막을 가능성이 높다고 관측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2009년 6월 실시하는 유럽 의회 선거 이전까지 조약을 체결한다는 당초 구상에는 차질이 빚어질 전망이다.

<국제부|최희진 기자 dais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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