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력 세진 러시아, 목소리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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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속 경제성장 자신감으로 서방 중심 국제 금융·무역기구 개편 요구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6월 9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국제경제포럼의 ‘글로벌 에너지’ 시상식에 참석해 인사를 하고 있다. <경향신문>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6월 9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국제경제포럼의 ‘글로벌 에너지’ 시상식에 참석해 인사를 하고 있다. <경향신문>

지난 6월 10일 러시아의 옛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밤은 화려했다. 최고급 호텔들은 경제계 거물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파이낸셜타임스(FT) 등에 따르면 도이체방크, BP, 로열더치셸, 네슬레, 셰브론, 코카콜라 등 세계적인 거대 기업의 대표 6000여 명이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고향인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국제경제포럼’에 자리를 함께 했다.

이 행사에는 러시아가 경제력이 성장한 것을 세계 만방에 ‘자랑’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글로벌 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은 잘 나가는 러시아 경제를 의식, 바쁜 시간을 쪼개가며 참석하는 ‘성의’를 보였다.

요즘 러시아의 행보는 ‘거침없이 하이킥’이다. 국력이 커지자 이젠 대놓고, 미국과 유럽 국가들을 향해 제 목소리를 내고 있다. 포럼 연설에 나선 푸틴 대통령은 이날 작심한 듯 국제 금융무역기구의 재편을 강하게 요구하고 나섰다. 푸틴은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IBRD), 세계무역기구(WTO)가 서방 선진 7개국(G7) 중심으로 짜였다며, 이제는 ‘판갈이’를 해야 할 때라고 주장했다. FT는 “푸틴 대통령이 지금의 국제금융무역기구에 대해 ‘낡고, 비민주적이고, 덩치만 커서 다루기 힘들다’고 직설적으로 공격했다”고 전했다.

GDP규모 세계 11위 경제대국

푸틴은 “50년 전에는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60%가 G7 국가에서 나왔지만 이제는 전 세계 GDP의 60%를 G7 이외의 국가에서 창출하고 있다”며 더 이상 G7이 국제금융 및 무역 질서를 좌지우지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푸틴의 말은 옳다. 국가별 GDP 순위(표 참조)를 보면, G7이 더 이상 세계 경제의 1~7등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G7을 처음 만든 1975년에는 G7이 냉전 당시 경제적으로 우위에 있던 서방진영의 경제를 쥐락펴락 했다.

그러나 지금은 냉전체제가 끝나고 전 세계는 하나의 경제권이 됐다. 중국은 세계 4위의 경제대국이다. 브라질(10위)과 러시아(11위)의 경제는 빠른 속도로 커간다. G7의 ‘말미’에 있는 이탈리아와 캐나다를 추월하는 것이 얼마 남지 않은 일로 보인다. 상황은 이렇지만 지금까지 국가 지도자들은 공개적인 자리에서는 IMF와 세계은행을 대놓고 공격하지 않았다. 개도국들은 세계은행 등에 밉보이면 원조를 제대로 받을 수 없다는 부담을 안고 있다. 선진국들은 ‘황금 분할’을 하고 있는 현 체제를 굳이 바꿀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IMF 총재는 서유럽인, 세계은행 수장은 미국인이 나눠 맡는다는 뿌리 깊은 관행이 있다. 이 때문에 최근 울포위츠가 여자친구에게 인사상 특혜를 준 사실이 드러나 세계은행 60년 역사상 처음으로 중도퇴진하는 불명예를 안았음에도, 후임 총재 자리는 또 미국인에게 돌아갔다. 울포위츠는 미국 국방부 부장관을 지냈고, 후임자인 졸릭은 무역대표부(USTR) 대표를 역임했다. 미국 대통령이 장·차관을 임명하듯, 세계은행 총재가 선임되는 것이다.

IMF도 회원국은 180개 나라가 넘지만, 의사결정권을 가진 이사국은 24개국에 불과하다. 미국 등 8개국은 단독 이사가 되는 반면, 대부분 국가는 어쩌다 한 번씩 이사직을 돌아가며 맡는다. 게다가 미국은 거부권까지 갖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국제 경제기구뿐 아니라 국제 결제통화에 대해서도 불만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국제금융시장에서 기껏해야 달러와 유로 두 통화만 사용되는 것은 불충분하다”며 “러시아 루블화를 포함한 다른 나라 통화가 세계 경제교역에서 더 큰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공급업자와 고객에게 도움이 된다면 러시아 수출품에 대해 루블화로 대금을 지급해야 할 시기가 됐다”고 덧붙였다.

푸틴 대통령이 당당하게 큰 소리를 친 것은 러시아 경제가 고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덕분이다. 러시아는 지난해 6.5%의 성장을 기록했다. 세계 평균은 5.4%였다. 2005년에도 세계 평균(4.9%)보다 높은 6.4%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세계 제1의 산유국으로 고유가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러시아의 외환보유액은 3000억 달러를 넘는다. 한·소련 수교과정에서 진 경협자금 20억 달러를 갚지 못하던 러시아로서는 상전벽해(桑田碧海)라 할 만하다. 2000년 1778달러에 불과하던 1인당 국민소득이 지난해에는 7000달러에 근접했다.

“2020년엔 세계 5위 경제국”

세계적인 기업들이 지갑이 커진 러시아 시장을 노리고 너나없이 진출하면서 모스크바의 사무실 임대료는 1㎡당 3000달러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이런데도 공실률은 1%를 밑돈다. 사무실을 구하지 못해 야단이다. 내년에 임기가 끝나는 푸틴 대통령의 후계자 중 한 명으로 거론되는 세르게이 이바노프 러시아 제1부총리는 경제포럼에서 “러시아는 2020년까지 세계 5위 경제국으로 부상할 것”이라고 기염을 토하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6월 10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국제경제포럼에 참석해 연설하는 것을 참석자들이 대형 스크린을 통해 지켜보고 있다. <경향신문>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6월 10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국제경제포럼에 참석해 연설하는 것을 참석자들이 대형 스크린을 통해 지켜보고 있다. <경향신문>

그는 러시아가 천연자원 위주의 경제에서 벗어나 핵에너지, 항공, 우주, 조선, 소프트웨어 및 나노기술 쪽에서 전 세계 생산의 10%가량을 담당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러시아는 올 가을쯤이면 WTO 가입 협상도 마무리지을 것으로 보인다. 전통적인 군사강국인데다 경제력이 뒷받침되자 러시아는 푸틴 대통령이 직접 나서 미국의 동유럽 미사일방어체제(MD) 구축과 관련, 핵전쟁 위협을 제기하며 강력하게 반발하는 등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에 반기를 들고 있다.

미국과 갈등을 빚는데도 CEO들은 러시아 시장이 돈이 된다고 보고, 관심의 끈을 조금도 늦추지 않고 있다. FT는 “이번 경제포럼에 참석한 글로벌기업 CEO들은 러시아와 서방국가 간 관계가 악화하고 있음에도 러시아에 대한 투자를 계속할 뜻을 밝혔다”고 보도했다. 이번 포럼 기간 중 러시아는 항공사 아에로플로트가 미국 보잉의 신형 여객기 드림라이너 22대를 구입하기로 하는 등 글로벌 기업의 물품 33억 달러어치를 사겠다는 계약을 맺어 ‘큰손’임을 분명히 보여줬다.

<국제부|김용석 기자 kimy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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