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을 자극하라! 독자는 다시 돌아온다
![[커버스토리]일본소설에 점령당한 한국소설](https://img.khan.co.kr/newsmaker/728/cover0.jpg)
무라카미 하루키가 한국 베스트셀러 시장을 점령했다. 무라카미 류, 요시모토 바나나도 더이상 낯선 이름이 아니다.
쉽고 재미있는 일본소설. 독자들의 읽고 싶은 욕망을 우리 작가 대신 채워주고 있다. 하지만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한국소설의 싹을 틔울 때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새로운 상상력과 글쓰기로 무장한 신예작가들이 곳곳에서 고개를 들고 있다. 그들은 과연 한국 소설시장을 탈환할 수 있을 것인가?
‘한국소설의 위기’. 요즘 출판계를 달구는 최대 담론이다. 김훈과 공지영을 제외하면 잘 팔리는 작가가 없다는 하소연이다. 문학전문 출판사들은 “한국소설은 이제 어떤 작품을 내도 팔리지 않는다”고 푸념한다.
한국소설의 위기론에 더욱 불을 지핀 것은 일본소설의 인기다.
일본소설의 선전은 대형서점이 집계하는 베스트셀러 목록만 훑어봐도 쉽게 알 수 있다. 교보문고 5월 3째 주간 베스트셀러 10위권에 든 한국소설은 김훈의 장편 ‘남한산성’(1위)과 은희경의 단편집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4위) 뿐이다.
반면 일본소설은 요시모토 바나나의 ‘아르헨티나 할머니’(3위)와 ‘키친’(10위), 오쿠다 히데오의 ‘공중그네’(6위)와 ‘면장 선거’(9위), 요시다 노리코의 ‘눈물이 주룩주룩’(8위) 등 무려 다섯 권이다.한국소설시장을 일본소설이 점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루키 마니아 국내에 5만 명 이상
지난해에도 한국 시장에서 일본소설의 존재는 눈부셨다. 그나마 공지영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그리고 일본작가 츠지 히토나리와 함께 작업한 ‘사랑 후에 오는 것들’이 2006년 전체 소설 집계에서 1위와 2위를 차지한 게 잔뜩 위축된 한국문단에 촉촉한 단비가 됐다.
일본소설이 한국독자들을 사로잡은 것은 1989년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가 국내에 소개되면서부터다. 다른 출판사가 원제 ‘노르웨이숲’으로도 출간한 적 있는 ‘상실의 시대’는 지금까지 70만 부가 팔렸다. 이후 하루키의 모든 작품이 국내에 속속 소개됐고 일본소설은 한국시장에서 본격적으로 입지를 다지기 시작했다. ‘상실의 시대’를 비롯해 ‘해변의 카프카’ ‘어둠의 저편’ ‘도쿄괴담집’ 등 하루키 소설의 상당수를 번역 출간한 문학사상사의 정종화 팀장은 “국내에 하루키 마니아가 5만 명 이상 형성돼 있어 하루키 소설의 경우 10만 부 안팎은 기본으로 판매된다”고 말했다.
1990년대 무라카미 하루키를 필두로 무라카미 류, 요시모토 바나나가 한국에 충성스러운 독자를 양산했다면,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오쿠다 히데오, 츠지 히토나리 등의 인기는 2000년대에 구축된 것이다.
한국소설의 부진과 대조적으로 일본소설이 부쩍 사랑을 받자 국내 출판사의 관심은 일본작가에 집중했다. 이는 최근 몇 년 사이 국내에 소개된 일본소설의 폭발적 증가가 입증한다. 2003년 191종이 번역된 일본소설은 2004년 242종, 2005년 420종을 거쳐 2006년 무려 462종이나 출간됐다.
일본의 스타작가를 잡으려는 국내 출판사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일본소설의 저작권료도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일본소설과 한국 출판사를 연결하는 에이전시가 국내 출판사 간 경쟁을 부추기면서 호가를 높이고 있는 것이다. 빅히트 일본소설인 ‘공중그네’와 신작 ‘면장 선거’의 국내 저작권을 가진 은행나무 주연선 사장은 “국내 출판사 간의 과당경쟁 탓에 3년 전에 비해 일본소설에 대한 저작권료가 적게는 2~3배에서 많게는 10배 이상까지 뛰었다”고 말했다. 주 사장에 따르면 아쿠다가와상이나 나오키상 등 일본의 각종 문학상 수상작이나 서점관계자들이 가장 기대되는 작품에 시상하는 서점대상 수상작의 경우 불과 3년 전만 해도 선인세 개념의 저작권료로 1000만~1200만 원 정도를 지불했다. 하지만 지금은 1억 원 이상을 줘야 한다. 수상작이 아닌 소설의 저작권료도 종전엔 200만~300만 원 수준이던 것이 지금은 800만 원 정도다. 물론 저작권료로 지불한 것 이상으로 책이 팔릴 경우엔 그에 따른 인세를 추가로 줘야 한다. 국내 출판된 일본소설 중 손익분기점을 넘긴 작품이 전체의 10% 수준임을 감안하면, 일본소설에 대한 ‘묻지마 수입경쟁’이 국내 출판사에 큰 손실을 끼칠 수 있다는 얘기다.
분명한 사실은 최근 몇 년간 베스트셀러 상위에 일본소설의 비중이 높은 것은 일본소설에 한국독자를 매혹하는 힘이 있음을 입증한다는 점이다. 출판관계자들이 “일본소설의 저작권료에는 분명 거품이 있지만 작품 자체에는 거품이 없다”고 입을 모으는 것도 그런 배경에서다.
일본소설 저작권료 10배 이상 뛰어

일본소설의 선전과 한국소설의 부진. 공지영과 김훈을 빼면 한국소설은 어떤 작품을 내도 되지 않는다는 하소연이 줄을 잇고 있다. 사진은 교보문고 국내소설 코너. <김재구 기자>
요즘 한국독자 사이에 인기를 끌고 있는 일본소설은 공통적으로 무거운 주제도 가볍고 밝고 재미있게 서술하는 장점을 지녔다. 출판칼럼니스트 박지현씨는 “요즘 젊은 세대는 지나치게 무겁고 진지한 것을 반기지 않고, 음악을 듣거나 잡지를 보듯이 자연스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어떤 독특한 것을 원한다”며 “일본소설은 바로 그런 욕구를 채워준다”고 밝혔다. 소설가 박민규씨는 최근 계간 ‘문학동네’ 여름호에서 “지금 일본소설이 많이 팔리는 이유는 일본문학이 그만큼 앞섰기 때문”이라며 “그들이 우리보다 훨씬 오랜 세월동안 소설을 써오면서 노하우를 축적한 결과”라고 말했다.
또 간과해서는 안 될 사실은 일본소설이 잘 팔리기 때문에 한국소설이 안 팔리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한국출판연구소 백원근 부장은 “독자들의 요구를 충족시켜 줄 만한 국내소설의 등장이 부진한 상태에서 새로운 공급처를 찾아야 했고 그 경로 중 하나인 일본소설이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이라고 분석했다. 한국소설이 채워주지 못한 틈새시장을 일본소설이 치고 들어온 셈이다.
그렇다면 한국소설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소설은 지나치게 무겁고 서사가 약하며 상상력이 빈곤하다는 비판이 일반적이다. 또 ‘끼리끼리 잘 봐주기식’의 ‘주례사비평’에 대한 환멸 그리고 단편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문학상 제도도 한국소설의 발전을 가로막는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한기호 소장은 “한국문학이 성장한 것은 6·25전쟁, 남북분단, 독재권력 등 역사적으로 암울한 시대를 겪었기 때문”이라며 “문제는 이 같은 외적 조건이 어느 정도 해결되고 젊은 세대의 생활상과 가치관이 크게 변화한 오늘날까지 한국 작가들은 거대담론이나 후일담 또는 공격적 페미니즘 소설을 들고 나온다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문학에는 달라진 삶의 형태와 고민을 담아내야 하는데 우리 소설은 여전히 과거패턴을 답습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천정환 성균관대 국문과 교수 역시 계간 ‘세계의 문학’ 봄호에 기고한 글에서 “독자들은 즐기기 위해 또는 뭔가 도움을 받기 위해 책을 읽는데 한국소설의 주류를 이루는 작품들은 여전히 민족적·국가적 측면에 몰두하고 있다”고 비판한 바 있다.
소설가 박민규가 계간 ‘문학동네’ 여름호가 마련한 좌담에서 “한국문학은 단 한 번도 번성한 적이 없고 이제 겨우 습작기에 들어간 것”이라고 냉소적으로 내뱉은 말은 꽤 설득력이 있다. 박민규는 “기존의 한국소설, 한국문학을 젊은 세대들이 올드하게 느낀다고 하는데 올드해서가 아니라 실은 어려서 그런 것”이라며 “이유는 우리의 진도가 여기까지인 것이고, 지난 수십 년간 그나마 우리가 일군 것은 리얼리즘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단언했다. 사실과 환상은 문학이 가진 두 개의 유전자 줄기인데, 한국소설에 공상과학(SF), 추리소설, 공포소설, 판타지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외국소설의 점령 속에서 한국소설은 정말 바람 앞에 선 촛불과 같은 신세인가. 하지만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한국소설이 싹을 틔워 꽃을 피우려 하는 시기라는 희망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문화평론가인 서영채 한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는 “1980년대만 해도 문학은 현실에 대해 실천적인 힘을 가져야 했기 때문에 리얼리즘적 기준이 심했고, 문학 자체에 대한 시대적 후광도 있었다”며 “하지만 1990년대 들어 대중문화가 활기를 띠면서 문학에 대한 후광 없이 원점에서 문학을 시작해야 했고 그때부터 조금씩 축적된 힘이 나타나고 있다”고 주장했다.
‘위기’가 아니라 ‘호기(好期)’라는 주장의 근거는 몇 가지로 요약된다. 우선 한국 작가의 소설이 한국적인 특수성을 강조하던 시절에서 벗어나 다양한 연령대의 작가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엮어내기 시작한 것을 꼽을 수 있다. 서영채 교수는 “우리 소설이 1980년대에 가지고 있던 우국지사 또는 지식인의 외투를 벗어던지고 20대의 김애란부터 50대에 본격적으로 소설가의 길에 들어서 육순이 된 김훈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문학 속에 뛰어들면서 우리 소설은 탄력성과 보편성을 가지게 됐다”며 “특히 젊은 작가들의 상상력이 매우 자유로워져 이야기의 스펙트럼이 넓어진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젊은세대, 무겁고 진지한 것 안 읽어
새로운 상상력과 글쓰기를 보여주며 문단과 대중의 주목을 끌고 있는 젊은 작가군은 박민규, 김애란, 김언수, 이기호, 김중혁, 한유주, 정이현 등이다.
정치적·역사적 무게를 지닌 문제작들로 명성을 얻은 황석영씨가 2000년대 들어 연달아 발표한 3편의 장편에서 보이는 변화도 눈길을 끈다. 서영채 교수는 “황석영씨의 최근작들은 이전의 현실에 대한 중압감을 많이 떨어뜨리며 새로운 스타일을 보여주고 있다”며 “신경숙이 종전의 작품과는 다른 스타일의 장편 ‘리진’을 발표한 것도 우리 작가들의 변화를 읽게 한다”고 말했다.
발표하는 소설마다 ‘불패신화’를 낳고 있는 김훈과 공지영의 힘이 어디에서 비롯한 것인지를 살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장르나 문체는 판이하지만 두 작가의 공통점은 취재를 철저히 한 후 집필한다는 점이다. 4월 12일 발간해 지난 5월 말 현재 벌써 10만 부를 훌쩍 넘긴 ‘남한산성’을 집필하기 위해 김훈은 2년간의 준비기간을 거쳤고, 집필에 7개월을 소요했다. 1년 넘게 베스트셀러 상위를 기록하며 영화로도 제작된 공지영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지금까지 88만 부가 판매됐다. 공지영이 이 소설을 집필하기 위해 교도소를 들락거리며 실제 사형수와 면담을 하는 등 면밀한 취재를 거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한국소설에 희망이 있음을 보여주는 근거는 또 있다. 한국의 문학시장이 작아졌다고는 하지만 소설을 읽는 독자는 여전히 많다는 사실이다. 문학평론가인 최원식 인하대 국문학과 교수는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층도 두텁고 소설을 쓰겠다며 신춘문예 등 신인등용문을 열심히 두드리는 문학지망생도 굉장히 많다”며 “현재는 일본소설을 비롯한 외국소설이 국내 소설 베스트를 장악하고 있다고 해도 한국소설이 우리 독자의 욕구와 제대로 만나기만 하면 언제든지 독자는 돌아온다”고 확언했다. 최 교수는 덧붙여 “작가들은 지금 한국 독자들이 왜 외국소설에 매료되었는지 그 원인을 분석함으로써 독자들이 우리 소설에서 어떤 부족함과 갈증을 느끼는지를 깨닫고 독자의 욕망을 작가 나름의 새로운 글쓰기로 충족해주면서 소설시장을 탈환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국소설이 도약하려면 작가들이 국내 시장만 겨냥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에도 귀를 기울여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미 미국을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고정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소설을 쓸 때 영어로 번역하는 데 무리가 없는지까지 고려하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출판칼럼니스트 박지현씨는 “소설 속 주인공의 생활양식도 그렇지만 문체까지도 치밀하게 계산한 정교함과 국제성을 지향한 작가의식은 세계적인 ‘하루키 현상’을 일으킨 요인”이라고 한 기고문을 통해 단언했다.
<박주연 기자 jypar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