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써야 할 빈 구석을 고민한다”

문학동네
이기호의 작품은 독자들에게 쉽게, 잘 읽힌다. 마지못한 듯 운을 뗐다가도 결국엔 할 말 다하는, 재치 있게 의뭉스러운 스타일이다.
“누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소설은 그 사람이 살아온 이력만큼 나온다고. 나는 에라이, 뿅! 만큼 살았으니, 에라이, 뿅! 같은 소설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누가 뭐라 하더라도 그것이 나에겐 리얼리즘이었으니까. 그것이 내 태생이었으니까.” - 소설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중
전작 ‘최순덕 성령충만기’(문학과지성사, 2004)에서 랩, 성경, 경찰조서 등과 이종교배를 통해 동시대 다양한 소시민의 삶을, 마치 저잣거리의 이야기꾼처럼 맛깔나게 들려준 바 있는 소설가 이기호(36).
그는 지난해 가을 출간한 소설집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문학동네)에서도 독자에게 2인칭 화법으로 최면을 걸기도 하고(‘나쁜 소설-누군가 누구에게 소리 내어 읽어주는 이야기’), 일체의 서술 없이 할머니와 주고받는 대화만으로 소설을 이어 나가는가 하면(‘할머니, 이젠 걱정 마세요’), TV 요리프로그램 진행자의 말투로 요리강좌를 겸한 이야기 한마당을 펼치기도 했다(‘누구나 손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가정식 야채볶음흙’).
그가 선호하는 주인공의 이름은 욕지거리를 연상하게 하는 ‘시봉’이다. 소설 속 주인공이라고 하기엔 함량미달로 보이는, 궁상스러운 인물들의 좌충우돌, 황당하고 기막힌 상황에 정신없이 웃다 보면 독자는 어느 순간 가슴이 찡해진다. 작가는 “누구를 가르치거나 위로해줄 처지는 못 되고, 그저 같이 붙잡고 울어주는 게 내 한계”라고 말한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이기호를 ‘글월로 세상을 계몽하는 지식인’형 소설가도, ‘글로 억압과 싸우는 투사’형 소설가도, ‘문자로 예술하는 고독한 댄디’형 소설가도 아니라고 평했다. 대신 그는 이기호를 ‘육체파 소설가’로 명명했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 위한 의지와 형식 실험이 그 근거다.
이기호의 작품은 독자들에게 쉽게, 잘 읽힌다. 마지못한 듯 운을 뗐다가도 결국엔 할 말 다하는, 재치 있게 의뭉스러운 스타일이다.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나 추계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와 명지대학교대학원을 나온 후 1999년에 현대문학 신인추천공모에 단편소설 ‘버니’가 당선되면서 등단한 그는, 이야기꾼으로서 끼를 맘껏 선보이며 문단의 주목을 받아 왔다.
소설이 잘 안 풀릴 때면 종로통을 하염없이 걷는다는 그는 “약장수나 뱀장수들이 행인들에게 소리치는 말을 들어 보면 내 소설의 문장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선연히 깨닫는다”고 했다. 문학평론가 정여울이 “약장수의 현란한 청중 유혹술과 유흥가 ‘삐끼’의 능청스러움. 이것이 이기호가 보여주는 문체의 힘”이라는 평가는 우연이 아니다.

문학동네
한국 소설의 위기라는 진단에 대해 그의 입장은 단호하다. 계간 ‘문학동네’ 여름호의 ‘한국문학은 더 진화해야 한다’는 대담에서 이기호는 “위기라는 평가를 하는 사람은 작가들이 아니다”라는 의견을 냈다. 대학 강의를 겸하는 그는 “1970, 1980년대 소설을 아이들에게 읽혀보면 독법이나 해석의 방향이 일정한데 요즘 소설에 대해서는 매우 다양한 독법이 나온다”면서 “작가들의 코드 자체가 단일해 보이지만 사실은 그 안에서 매우 복잡다단하고 넓어졌다는 얘기”라고 분석했다. 다종다양한 문학이 존재하는 것이 한국 문학 성장의 동력이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도 있다. 평론가 심진경씨는 계간 ‘창작과 비평’ 봄호에 발표한 ‘뒤로 가는 소설들’이라는 글을 통해 이기호의 작품을 “형식만 새로울 뿐 삶에 대한 통찰력이 부족하다”고 비판했다. 현실을 우연적 사건의 연속으로 그려내거나 부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 지향적이며 인간과 세계에 관한 새로운 인식적 통찰에 이르기보다 현실에 대한 통념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평가에 대해 이기호의 생각은 어떨까? 평소 “문학이 계몽의 기능을 수반하게 되는 사회야말로 어쩌면 참으로 비참한 사회가 아닐까”라고 반문해온 그는 “내 주위에도 문학이 화염병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는 친구도 있지만, 저처럼 아무 생각 없이 ‘내가 써야 할 빈 구석’을 생각하고 고민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동안 한국 문학을 리얼리즘 하나만 가로질렀던 만큼, 이제는 조금씩 다양하게 변화하는 과정으로 보면 좋겠다”고 말했다.
<조득진 기자 chodj21@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