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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비닛’의 김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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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청스런, 그러나 소설을 되묻는 ‘구라’

[커버스토리]‘캐비닛’의 김언수

대부분의 ‘정보’는 작가가 지어낸 ‘구라’다. 물론 이 ‘거짓말’에는 작가 이전에 이미 사회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실재 여부가 불투명한 이야기들이 섞여 있다.

소설가 김언수씨(36)에게 2006년은 아마도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특별한 해일 것이다. 장편소설상 수상은 그가 바랐던 소박한 꿈-남해바다 근처에서 작가생활, 책상을 놓을 서재, 글만 써서 먹고 살기 위한 월 80만 원 정도의 수입, 어슬렁거리기 등… 을 이루게 해줬기 때문이다. 이미 200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중편부문에 당선돼 등단했고, 그는 그해 겨울 하던 일을 그만뒀다. 전업소설가라는 꿈을 위해서다. 그는 말한다. “모아둔 것이라곤 빚밖에 없었다. 방세를 낼 수 없어 방을 뺐다. 보증금으로 밀린 방세를 내고 남은 돈으로 떠돌기 시작했다. 삼천포, 대구, 경주, 원통, 나주, 포천, 태백…” ‘낭만’과는 거리가 멀었다. 문학평론가 김윤식씨는 ‘캐비닛’에서 ‘낭만적’이라는 말이 딱 두 번밖에 사용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그의 삶을 좀 더 거슬러 올라가 더듬어보자. 스물다섯 살 늦깎이 대학생이 되자마자 그의 집안은 IMF 외환위기로 몰락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단란주점 웨이터도 하고, 공사판에도 나가고 공장도 다녔다. 밑바닥 인생의 상흔은 그가 낸 장편소설 ‘캐비닛’(문학동네)의 캐릭터로 되살아난다.

이렇게 소개를 하다보면 마치 우울모드의, 방황하는 젊은 삶을 다룬 흑백독립영화 같은 정경이 떠오르지만 실상 소설 ‘캐비닛’은 정반대다. 소설은 서두에서 다음과 같은 경고문을 제시한다.

“당신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하를 보게 될 것이다.” 쉽게 눈치챌 수 있듯, 영화 ‘매트릭스2:리로디드’ 광고카피의 패러디다. 짐짓 ‘이제부터 칙칙한 이야기를 들려줄게’ 하는 얼굴을 하고 있는 듯하지만, 이 모든 이야기는 그저 진지한 농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 137 대 1이라는 경쟁률을 뚫고 연구소의 직원으로 취직한 공 대리는 정작 어렵게 들어간 그 철밥통 직장에서 별로 할 일이 없다는 걸 발견한다. 어느 날, 심심하고 따분하던 차에 4층 복도 끝에 있는 자료실에 들어간 그는 자물쇠가 채워져 있는 지극히 평범한, ‘8, 90년대 동사무소나 구청에서 일괄적으로 유행했고, 냄새나는 추리닝이나 한쪽만 남은 테니스 양말들을 아무렇게나 구겨넣고 쾅! 닫기 적당한’ 캐비닛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마치 ‘TV특종 놀라운세상’이나 ‘쇼킹 아시아’에서나 나옴직한 그로테스크한 사람들의 기록이 담긴 파일을 발견한다. 소설은 공 대리와 캐비닛에 자료를 수집해놓은 권 박사를 비롯한 연구소 주변 인물들, 그리고 그 파일에 담긴 사람들의 이야기다. 휘발유나 석유, 유리를 먹는 사람들, 손가락에서 은행나무가 자라는 사나이, 고양이가 되고자 하는 사람과 되게 해줄 수 있다는 마법사, 타임스키퍼, 토퍼러, 심토머, 도플갱어, 샴쌍둥이….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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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들어봄직한 이야기이지만 실은 대부분의 ‘정보’는 작가가 지어낸 ‘구라’다. 물론 이 ‘거짓말’에는 작가 이전에 이미 사회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실재 여부가 불투명한 이야기들이 섞여 있다. 소설가 전경린에 따르면 이 소설의 서두에 나오는 ‘루저 실바리스’라는 인물은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소설에 딱 두 줄 언급되었을 뿐인데, 김언수는 시치미를 뚝 떼고 ‘어느날 화산 폭발로 사라진 상피에르 마을 이야기’의 화자로 그를 등장시키고 있다. 문학평론가 신수정씨는 “소설 ‘캐비닛’의 이야기 자체만으로는 망상이나 환상에 가깝지만 끊임없이 현실의 알레고리로 작용한다. 이를테면 이 모든 이상증후군자들은 대개의 경우 아웃사이더 혹은 루저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실제와 환상의 경계가 무너진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의 공포 혹은 공포의 환상을 물리적인 세계에서 실제로 만난다. 환상 속의 악어는 실제로 사람을 물어 죽이고, 삼십 센티미터 높이의 계단에서 떨어지면 온몸이 바스러진다.…(중략)…이제 다시 물어보자. 당신은 아직도 침대 밑에 있는 악어가 가짜 악어라고 생각하는가?”(‘캐비닛’ 중 ‘블러퍼’)

비록 첫 장편이지만, 작가는 근본적으로 허구일 수밖에 없는 ‘이야기’ 혹은 스토리텔링의 문제를 대담하게 던지고 있다. 전경린씨는 “김언수의 소설 속 캐비닛은 작가의 허구를 사실처럼 전달하는 매개물이고 이야기의 완충장치”라고 말한다.

사족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나 이 모든 게 ‘구라’였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형광등’ 독자들을 위해 소설가는 맨 끝에 다음과 같은 주의사항을 덧붙여 놓았다. “이 소설 속에 나오는 대부분의 정보는 창작되었거나, 변형되었거나 오염된 것이므로 권위 있는 학술지를 비롯하여 술자리 논쟁에 이르는 모든 곳에 정당한 논거로 사용될 수 없음을 밝힙니다…(중략)…그러니 혹시라도 이 소설의 내용을 사실적이거나 과학적인 논거로 사용할 시에는 이 점에 특별히 유의하여 망신당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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