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지구촌 최대 화두는 ‘행복학’… 국가 정책 최우선 과제로 연구 활발
음먹기 나름’이라고 여겨온 행복의 실체에 다가서려는 노력들이 진행되고 있다. 전 세계적인 웰빙(well-being) 중시 흐름 속에서 이제는 행복의 ‘조건’에 대한 학문적인 연구들이 붐을 이루고 있다. 각국 지도자들의 최대 관심사도 행복으로 소구된다. 행복을 잡으려는 시도는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국가 정책의 우선순위는 행복 “우리는 무엇으로 국민들의 호주머니를 채울 것인가를 고민하는 데서 나아가 어떻게 하면 그들의 영혼이 기쁨으로 충만할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영국 보수당의 데이비드 캐머런 당수가 최근 어느 연설에서 했다는 이 말은 21세기 각국 정치인들이 직면한 과제를 간결하게 요약한다.
한발 앞서 경제적 풍요를 경험한 선진국은 물론이고 이제는 많은 개발도상국에서도 일과 여가의 균형 혹은 일과 가정의 조화가 강조되는 추세다. 더 많이 일해서 더 많은 돈을 버는 것이 결코 행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인식이 빠르게 힘을 얻고 있는 것이다. 세계화의 폐해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압력도 지구촌 곳곳에서 높아지고 있다.
실제로 ‘행복의 정치학’은 세계 곳곳에서 활발하게 구현되고 있는 중이다. 정부가 자체적으로 국민 행복지수를 개발해 사회 정책 수립의 기본 틀로 사용하는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다. 효율성과 경제적 부가가치 창출 효과 등을 넘어서서 행복, 즉 국민 개개인의 만족감 따위를 고려한 정책 제안들도 나오고 있다. 과거 부유한 이에게 세금을 많이 걷거나 사회보장제도를 강화하는 등의 방안이 좌파 진영을 중심으로 논의됐다면 이제는 이념을 초월해 공통의 화두가 되고 있는 것이다. 지도자들도 소득과 행복의 함수관계에 관한 경제학자들의 견해에 귀를 기울이며, 행복의 비결을 찾아내는 데 몰두하고 있다.
태국 정부는 교육, 가족, 직장, 건강 등의 통계수치를 행복감이라는 잣대로 산출한 자료를 토대로 농촌 지역과 학교 지원 확대 등의 내용이 담긴 장기 발전 계획을 수립했다. 가파른 경제성장 이면에 심화된 사회 양극화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중국은 올해 말까지 새로운 국민 행복 지수를 마련해 ‘조화로운 사회’ 건설의 기틀을 닦을 계획이다.
영국에는 행복과 관련된 통계들을 관리할 ‘와이트홀 웰빙 워킹그룹’이라는 정부기구가 신설됐다. 최근 후생 분야가 전공인 노동 경제학자 데이비드 블렌치플라워가 영국 중앙은행 이사회의 일원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행복 경제학의 르네상스 전 세계적으로 ‘행복한 나라’ ‘웰빙 국가’를 추구하면서 행복 연구도 급물살을 타고 있다. 얼마 전 이탈리아 로마에서는 전 세계 내로라 하는 행복 연구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기쁨의 측정 가능성에 대해 논의했다. 올 여름에는 세계은행 수석 경제학자, 각국 고위관리, 구글사 사장 등이 함께 국민총생산(GDP) 지수 외에 인류의 진보를 반영하는 새로운 지수 개발에 관해 이야기할 예정이다.
경제학의 영역에서 ‘행복’이란 변수가 환영받기 시작한 지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는 격언처럼 돈으로 살 수 없는 어떤 가치가 있다는 것은 동서고금을 통틀어 상식으로 통했다. 18세기 공리주의 사상가 제레미 벤담은 공공정책이 최대 다수의 행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추진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본격적인 행복 연구는 최근 들어 급부상했다. 평균수명 연장 등 삶의 질 향상과 맞물려 사회과학자들의 관심이 윤택한 삶, 후생 복지로 확대됐다. ‘인간은 어떤 환경에서 행복한가’라는 다분히 철학적인 문제 앞에서 안정적인 일자리, 튼튼한 가족, 인간관계 등과 같은 행복의 조건들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암울한 학문’으로 알려진 경제학이 행복과 희망을 이야기하는 옷을 갈아입었다.
학제간 연구 작업도 활기를 띠고 있다. 특히 뇌과학의 발전으로 인간의 뇌에서 행복감을 느끼도록 하는 부분 또는 물질을 밝혀내는 연구도 증가했다. ‘쾌락의 사이클(hedonic cycle)’이란 용어를 사용한 미 남가주대(USC) 리처드 이스터린 교수는 인간은 자신의 성취를 타인과 비교해서 생각하는 성향이 너무 강하게 각인돼 있기 때문에 만족감이 무한 상승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부자가 일반적으로 더 행복하다고 해도 일단 빈곤선을 넘은 이상에는 추가로 벌어들이는 돈에 대해 느끼는 행복감의 크기가 예전에 비해 점차 줄어든다는 것이다.
행복학의 패러독스 국민 전체의 행복을 정의하고 이를 국가정책에 활용하려는 시도는 생활밀착형 정치를 표방한다는 점에서 이전의 정치와 차별화된다. 그러나 이면도 있다.
우선 행복을 어떻게 측정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부딪힌다. 행복을 판단하는 데 고려해야 할 변수들이 워낙 다양하다 보니 통일된 기준을 만들기 위해서는 광범위한 사회적 합의가 필수적이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행복의 총량이란 불가능하기 때문에 결국 누구의 관점에서 보는 행복인가 하는 논란이 일 수도 있다.
그렇다 보니 정권이 입맛대로 행복을 규정하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다. 로마 회의에 참석한 연구자들은 행복 연구가 권위주의 정권에 의해 악용될 수 있다고 지적하며 연구 결과는 정책이 아닌 어디까지나 개인의 선택이라는 차원에서 적용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은둔의 왕국’ 부탄의 왕이 자연 보호를 명목으로 부탄 방문 해외 관광객에 대해 하루 200달러 이상 소비와 같이 현실성 떨어지는 규정을 공표한 것은 행복이 정치적 목표 달성을 위해 손쉽게 조작될 수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행복으로 가는 길이 하나뿐일 리는 없다. 그러나 경험상 검증된 길은 있다. 네덜란드 에라스무스 대학의 루트 빈호벤 교수가 각국의 행복 순위를 매긴 ‘세계행복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1위가 덴마크, 2위 스위스, 3위 오스트리아, 4위 아이슬란드, 5위 핀란드 등 스칸디나비아와 유럽 국가들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남부럽지 않은 확고한 사회안전망을 갖춘 나라들이다.
<국제부|김유진 기자 actvoice@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