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가 인종차별을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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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이민 2·3세 유권자 등록 적극적… 대통령선거서 우파후보 응징 나서

투표 안내서를 펴낸 토고 출신 랩가수 로스트가 선거참여를 독려하고 있다.

투표 안내서를 펴낸 토고 출신 랩가수 로스트가 선거참여를 독려하고 있다.

“교외의 ‘인간 쓰레기’를 쓸어버리겠다.”
2005년 가을, 프랑스 파리 북부의 한 도시를 방문했던 니콜라 사르코지 당시 내무장관의 말이다. 이민 2, 3세 젊은이들이 한 달 가까이 소요를 일으키면서 경찰과 충돌하던 때였다. 이 발언으로 사르코지는 이민자 사회에서 억압적인 공권력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그로부터 1년 뒤 그는 집권 대중운동연합(UMP)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4월 22일과 5월 6일 두 차례에 걸쳐 실시되는 선거에서 유권자의 표를 하나라도 더 얻어야 하는 입장이다.

반면 교외의 젊은이들에게 대선은 모욕을 되갚아줄 수 있는 기회다. “이제 ‘인간 쓰레기’가 투표할 차례다.” 정치에 무관심했던 프랑스의 이민 2, 3세들이 대선을 앞두고 스스로 유권자 등록을 하는 등 적극적으로 선거 과정에 참여하고 있다. 이들은 2년 전 소요를 겪으면서 실업과 인종차별 등 열악한 환경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은 투표뿐이라는 사실을 체득했다.

소요는 끝나지 않았다 3월 27일 오후, 파리 북부역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청년 100여 명이 창문과 자동판매기를 부쉈다. 일부는 역 안에 있는 상점의 유리문을 깨고 들어가 물건을 훔쳤다. 지나가던 청소년들이 약탈 행위에 가세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경찰이 도착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젊은이들은 경찰에게 플라스틱 병과 깡통을 던졌고 허공에 대고 욕설을 퍼부었다. “사르코지는 꺼져라!” “정의는 어느 곳에도 없다!” 경찰은 기차역을 이용하는 승객들에게 빨리 흩어지라고 재촉했지만 군중은 3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더 공격적으로 변해 쓰레기통과 관광 안내소에 불을 지르기 시작했다. 한밤중까지 이어진 경찰과 청년들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은 경찰이 최루탄을 쏘면서 1시간 만에 종료됐다.

사건의 발단은 사소했다. 한 흑인 청년이 검표원을 주먹으로 때린 뒤 무임 승차를 시도했다. 나중에 확인된 바에 따르면 그는 아프리카 콩고 출신의 불법 체류자였다. 순찰을 돌고 있던 경찰은 즉각 이 청년을 체포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일군의 흑인 젊은이들은 경찰이 부당하게 공권력을 남용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소요의 시작이었다. 파리 외곽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나던 청년들의 폭동이 수도 한복판으로 번진 것이다.

이날의 사건은 대선 쟁점으로 떠올랐다. 교외 지역에서 인기가 높았던 세골렌 루아얄 사회당 후보에겐 호재나 다름 없다. 그는 사르코지가 이민자를 통합하기보다는 추방하는 정책을 펴면서 민심을 악화시켰다고 본다. 루아얄은 이번 사태에 대해 “우파의 치안 정책은 완전히 실패했다”며 사르코지에게 책임을 돌렸다.

그러나 사르코지는 “정의가 그 사람들을 단호히 제재하기 바란다”며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사르코지의 후임자인 프랑수아 바루앵 내무장관도 유럽1 라디오 인터뷰에서 “이 일은 받아들일 수도, 용인할 수도 없는 폭력”이며 “어떤 것도 이 같은 행동을 정당화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외신들은 사르코지가 차기 대통령을 노리고 있다면 사태의 심각성과 긴급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이민자 문제는 새 대통령이 해소해야 할 사회·경제적 갈등의 축소판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상자를 냈던 폭동 이후 2년이 흘렀지만 교외의 높은 실업률과 인종 차별, 경제적 불평등은 해결되지 않았다. 북부역에서 소요를 목격했던 시민 시릴 지두(24)는 “2005년이 되풀이 되고 있다”며 “이민자들의 반란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투표로 세상을 바꾼다 이민자들이 폭력만 일삼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선거철을 맞이해 더 능동적으로 현실에 대처할 방법을 찾았다. 유권자로 등록하고 선거에서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이다.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게 장기적 목표이지만 당장은 사르코지의 당선을 저지하겠다는 계획이다. 정치를 남의 일로 여기던 이민자 젊은이들이 달라지고 있다.

성난 흑인 청년들이 기차역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성난 흑인 청년들이 기차역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변화는 통계로 확인된다. 내무부는 3월 27일 전국의 등록된 유권자 수가 4.2% 늘었다고 밝혔다. 1981년 이래 가장 높은 증가율이다. 특히 파리 교외의 증가율은 더 가파르다. 오드센은 7.9%, 센생드니에선 8.5% 늘었다.

소요가 처음 시작된 도시인 아르장퇴이유도 다르지 않다. 지난 3개월간 5000여 명이 새로 등록했다. 이 지역 전체 유권자의 10%에 이르는 규모다. 이곳에 사는 한 흑인 청년은 얼마 전 친구들과 함께 시청을 찾아 유권자 등록을 했다. 역시 사르코지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다. 카메룬 이민 2세인 그는 “우리는 (소요를) 잊지 못했다”며 “지난 1년 6개월간 대통령 선거만 기다려 왔다”고 말했다.

젊은이들의 투표 참여를 앞장서서 독려하는 것은 주로 흑인 랩가수들이다. 이들은 지난해부터 교외로 들어가 청년들에게 유권자로 등록하라고 설득했다. 토고 출신 랩가수 로스트(30)는 투표 안내서도 펴냈다. 프랑스의 선거 제도부터 국가(國歌), 대선 후보 인터뷰(사르코지는 응하지 않았지만)까지 유권자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담았다.

흑인 랩가수들이 보통 ‘건전하지 않은’ 내용의 가사를 지어 부른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 같은 정치 참여는 다소 뜻밖일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요즘 거리에서 사르코지를 비판하는 랩으로 즉흥 공연을 열며 적극적으로 선거운동을 하고 있다. 로스트는 “모든 문제를 하루 아침에 해결할 수는 없다”면서 “이번 투표가 변화의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사르코지도 교외의 이 같은 분위기를 알고 있다. 항의 시위가 일어날까봐 지난 2월 아르장퇴이유에 방문하려던 일정을 취소하기도 했다.

전체 유권자 중에서 파리 교외 이민자들의 비중은 크지 않다. 여론조사 기관 이폽은 그 비율을 4% 정도로 추정한다. 때문에 이들이 벌이는 사르코지 낙선 운동이 실제 선거에서 얼마나 큰 영향력을 발휘할 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지역이 갖는 상징적 의미는 무시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

사회당 관계자는 “교외의 상황을 바꿀 방법은 선거뿐이라는 인식이 폭동 이후 새롭게 형성됐다”며 “2007년 대선과 2002년 대선은 완전히 다를 것”이라고 전망했다. 주류 사회에서 배제됐던 교외 이민자들이 이번 대선에서 보란 듯이 실력을 행사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국제부/최희진 기자 dais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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