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바논 하리리 전 총리 암살 2주년 맞아 종파간 갈등 확산 내전 위기로

레바논 베이루트 순교자광장에 모인 하리리 총리의 추모 인파.
레바논이 내전의 위기로 치닫고 있다.
라피크 하리리 전 총리의 암살 2주년을 맞은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는 그를 추모하는 정부 지지파의 추도행렬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같은 시각, 인근에서는 헤즈볼라를 중심으로 한 반정부 세력이 모여 지난해 12월부터 이어진 저항시위를 벌였다.
이슬람 수니·시아파와 기독교계 등 20여 개 종파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레바논이 친(親) 정부와 반(反) 정부 세력의 정국 주도권 싸움이 격해지며 1975년부터 15년 간 이어진 내전 상황으로 또 다시 치닫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하리리 2주년, 추모와 저항 하리리 전 총리의 암살 2주년인 14일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 시내는 그를 추도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모인 30만 명의 인파가 넘쳐났다. 이들은 대부분 하리리를 승계한 시니오라 총리를 지지하는 수니파와 기독교 중심의 친정부 세력.
시니오라 총리는 이날을 추모일로 선언하고 공식 추모일로 지정했다. 가게와 학교는 물론 사무실도 모두 문을 닫았다. 추도 인파는 하리리의 묘 근방에 있는 순교자광장에 모여 “우리는 당신을 정말로 그리워한다”는 추도문으로 그를 추모했다.
하리리 전 총리의 아들인 사드와 그의 지지자들은 헤즈볼라 주도의 반정부파에 대항해 결집할 것을 촉구했다. 자밀 아야쉬(47)는 “우리는 누가 하리리 총리를 죽음에 이르게 했는지 알고 싶어 이 자리에 모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이 겨냥하고 있는 것은 헤즈볼라와 시리아. 하리리 총리의 암살 배후에 시아파 헤즈볼라와 이를 지원하는 시리아 정부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친정부파는 2주년 하루 전인 13일 3명을 숨지게 한 버스 폭탄 테러 역시 헤즈볼라의 소행인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테러가 발생한 비크파야 마을은 기독교계 마을로 마론파 기독교계인 아민 제마엘 전 대통령의 고향이다. 정부 지지파는 “이번 버스 폭발은 추모 집회에 찬물을 끼얹기 위해 계획된 테러”라며 비난했다.
같은 시간, 인근에서는 지난해 말부터 이어진 반정부 세력의 거리 농성이 계속되고 있었다.
헤즈볼라와 기독교계 반정부 세력은 “현 정부는 합법성을 잃었다”며 총리 사퇴와 조기 총선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시니오라 총리가 지난해 벌어진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이 시리아를 등에 업은 헤즈볼라의 무장 조직 때문에 이뤄졌다고 보고 유엔과 미국의 힘을 빌려 헤즈볼라의 무장을 해제시키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헤즈볼라는 이스라엘의 위협이 존재하는 한 무기를 내려놓지 않겠다고 공언하며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수준의 각료 지분(3분의 1+1)을 달라고 요구했으나 시니오라 총리가 이를 묵살하자 헤즈볼라는 연립내각에서 탈퇴했다.
시리아와 헤즈볼라는 하리리 암살과 관련, 자신들은 어떠한 개입도 없었다며 연관을 부인해왔다.

하리리 총리 추모를 위해 페이스페인팅을 한 레바논의 한 소녀.
종파갈등에서 이념갈등으로 레바논이 분열된 바탕에는 이슬람 수니, 시아 및 드루즈, 기독교계, 가톨릭계, 그리스정교 등 18개 종파가 복잡하게 얽힌 종교 갈등이 있다. 내전의 원인 역시 종파 간 갈등이었다.
온건 수니파인 하리리 총리는 ‘종파 간 권력배분안’을 제안해 90년 내전을 종식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배분안에 따른 거국내각에서 대통령은 기독교 마론파가, 총리는 수니파가, 의회의장은 시아파가 맡았다. 24명의 내각의 각료 수는 당시 인구 수에 따라 배분, 이슬람교계 12석을 수니파, 시아파, 드루즈파가 나누어 가졌고 기독교계 12석을 마론파, 그리스정교, 그리스카톨릭, 아르메니아정교, 개신교가 나누어 가졌다. 이같은 ‘나눠먹기식’ 권력 배분안은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해왔다.
오랫동안 권력을 유지해온 기독교계와 내전의 재건 과정에서 총리직을 맡은 수니파는 상대적으로 부를 축적할 수 있었으나 소외된 시아파 등의 불만은 계속 쌓여온 것이다.
2005년 하리리 전 총리가 베이루트에서 트럭 폭탄 테러로 피살된 후 레바논 내 종파간 세력 균형은 급속히 무너졌다. 특히 지난해 일어난 이스라엘과 헤즈볼라의 전쟁은 종파 간 갈등을 친정부·반정부, 친시리아·반시리아 혹은 친미·반미가 얽힌 새로운 이념 갈등으로 변화시켰다.
시리아의 영향력을 견제하는 수니파·기독교계의 친정부 세력과 시리아의 지원을 받는 시아파 헤즈볼라·기독교계 마론파 반정부 세력을 중심으로 헤쳐모여를 시작한 것.
양측의 충돌 가능성이 높아진 가운데 유혈 사태 수위는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지난달에는 베이루트 시내 아랍대학에서 시니오라 총리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 도중 총격이 발생하며 시위가 확대돼 4명이 숨지고 150여 명이 부상했다.

경찰관이 비크파야 마을의 폭탄 테러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내전으로 가나? 일부에서는 오랜 내전에 시달린 레바논은 전쟁의 폐해를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내전까지 이르지는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시니오라 총리는 확산되고 있는 반정부 세력의 시위를 무작정 방치할 수 없는 입장이고, 헤즈볼라는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어 내전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친·반 정부 시위대 간 또는 시위대와 공권력 간의 충돌이 인명피해로 이어질 때 곧바로 내전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레바논에서 내전이 본격화하면 안보 위협을 느낀 이스라엘이 개입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며, 최악의 경우에는 내전과 전쟁이 동시에 전개되는 시나리오도 예상할 수 있다.
이러한 가운데 최근 중도를 지향하는 ‘3·11운동’이 출범, 레바논 정국 안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 주목되고 있다. ‘3·11운동’은 하리리 전 총리 피살 이후 2005년 3월 14일 시리아 반대 시위를 주도한 ‘3·14그룹’과 2005년 3월 8일 헤즈볼라가 주도한 시위에 참가한 친시리아계 ‘3·8그룹’을 모두 배격하고, ‘정치통합’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 운동에 참가하고 있는 메르히 아부 메르히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다수의 레바논인들이 현 상황에 염증을 느끼고 있으며, 이제는 서로 대화를 통해 합일점을 찾을 때”라고 말했다.
한편 유엔은 지난주 하리리 암살에 관계된 의혹을 파헤치기 위한 국제형사재판소 설립 협정을 승인했다. 그러나 협정은 레바논 의회의 비준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실제 설립까지는 어려움이 따를 것으로 보인다.
<국제부/박지희 기자 violet@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