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C도 ‘생존경쟁’ 예외일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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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률 하락에 수신료 문제도 도마에… ‘공영성 명성’ 위상 지키기 고민

[월드리포트]BBC도 ‘생존경쟁’ 예외일 순 없다

인터넷과 모바일 기기가 정보의 유통을 장악하고 있는 뉴미디어 시대다. 신문, 방송 등 전통 매체들은 생존하기 위해 앞날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영국 대표 공영방송 BBC도 이같은 고민을 피해갈 수 없는 처지다. 해마다 정부로부터 막대한 TV수신료를 받아 재정을 꾸려나가기 때문에 당장 먹고살 걱정은 없다. 그러나 시청자들이 인터넷과 위성방송으로 옮겨가면서 시청률이 눈에 띄게 줄고 있다. 국민들이 보지도 않는 채널에 국가가 재정을 계속 지원해야 하느냐는 논란이 일고 있는 배경이다. BBC는 수신료 폐지론자들의 도전에 맞서 영국 대표 방송사의 위상을 지키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55세 백인 중산층 방송” BBC의 방송허가(칙허장·Royal Charter)는 10년마다 갱신된다. 정부는 올 초 허가를 갱신하면서 수신료를 향후 6년 간 매년 2~3%씩 인상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2016년까지 살림살이는 이 수신료가 해결해준다. 그러나 수신료 폐지론자들은 그 이후에도 정부가 예산을 지원해야 하는지 의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시청자가 계속 이탈하고 있기 때문이다.

20년 전 BBC의 시청률은 47%였다. 경쟁사 ITV와 채널4가 나머지 시청률을 나눠 가졌다. 그러나 현재는 BBC1(옛 BBC)과 BBC2, ITV, 채널4 등 지상파방송 전체 시청률을 다 합해도 33%에 불과하다. 대신 위성과 케이블방송이 시장을 잠식하고 있다.

젊은층일수록 지상파 TV를 보지 않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영국 방송통합규제기구 오브콤(Ofcom) 보고서를 보면 2001년 16~24세 청소년들은 전체 TV 시청시간의 74%를 BBC 등 지상파 채널에 할애했다. 그러나 2005년 이 비율은 58%로 줄었다. 실제 BBC의 시청층은 5개 주요 방송사 중 가장 나이가 많다. BBC 자체 조사 결과 BBC1과 BBC2 시청자의 평균 연령은 53~54세인 것으로 나타났다.

교육 수준이 낮은 저소득층 시청자들도 진지한 다큐멘터리나 시사물을 주로 다루는 BBC에 등을 돌리고 있다. 시사프로그램 ‘뉴스나이트’의 경우 저소득층의 시청률은 중산층 이상보다 17%포인트 정도 낮다. BBC의 한 고위 관계자가 “우리는 55세 이상 백인 중산층을 위해서만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는 셈”이라고 자조하는 것도 근거 없는 이야기가 아니다.

전문가들은 BBC가 변화를 두려워하고 안전한 프로그램만 만든다는 데서 시청률 하락의 원인을 찾는다. 프로그램이 모두 고상하고 장중하며 과거의 위대한 유산을 회고하는 데 그치고 있다는 지적이다. 새로 준비하고 있는 드라마 ‘로빈후드’나 ‘셜록홈스’도 모두 옛날 소재의 재탕이라는 한계를 안고 있다.

[월드리포트]BBC도 ‘생존경쟁’ 예외일 순 없다

위기는 기회다 공영성을 포기할 수 없는 BBC는 ‘당의정’ 전략을 채택했다. 공영방송에 걸맞은 주제를 다루되 오락이나 쇼 형식으로 포장하는 것이다. 일례로 과거엔 소수민족 문제에 접근하고자 할 때 늦은 밤 시사프로그램에서 토론을 벌였다. 그러나 요즘은 리얼리티쇼 ‘어프렌티스’가 그 역할을 분담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대기업에 채용되는 유능한 도전자 대부분은 소수민족 출신이다.

첨단 정보통신기술이 올드 미디어를 위기로 몰아가고 있다지만 새로운 기회가 될 수도 있다. BBC는 올 하반기부터 주문형 비디오 서비스를 실시하기로 했다. 인기프로그램을 원하는 시간에 인터넷에서 무료로 내려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현재 1년에 131.50파운드(약 24만5000원)의 수신료를 의무적으로 내는 시청자들에게 놓친 프로그램까지 볼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준다는 명분도 있다.

프로그램의 해외 판매가 증가 추세라는 것도 호재다. BBC 프로그램의 해외 판매망인 자회사 ‘월드와이드’는 지난해 1억4500만 파운드(약 2711억5000만 원)의 수익을 본사에 안겼다. 월드와이드는 BBC 웹사이트를 통해 향후 해외 방송사뿐만 아니라 해외 시청자들에게도 프로그램을 직접 판매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이 웹사이트의 해외 이용자 접속 건수는 매달 10억 회에 이른다. 자사의 좋은 프로그램을 널리 알리고 돈도 벌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

그러나 장사가 잘 되는 게 마냥 기쁜 일은 아니다. 자체 수입으로 회사를 유지할 수 있는데 굳이 수신료를 받을 필요가 있느냐는 지적을 논박하기 어려워진다. 수익사업과 수신료,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고 싶은 BBC의 딜레마다.

[월드리포트]BBC도 ‘생존경쟁’ 예외일 순 없다

“BBC가 곧 영국이다” 영국은 늦어도 2012년까지 방송 시스템을 디지털로 전면 전환할 계획이다. 주간 이코노미스트는 집집마다 디지털 셋톱박스를 설치하면 BBC를 골라보는 일이 기술적으로 가능해질 것이라고 전했다. 즉 셋톱박스에 남겨진 시청 기록을 확인해 BBC를 전혀 보지 않는 시청자에겐 수신료를 돌려줘야 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장기적으로 BBC의 재정 조달이 실시청자 위주로 재편될 수 있다는 전망이다.

그러나 수신료 폐지 여부는 단지 기술적·경제적 문제가 아니다. BBC의 상징성 때문이다. 영국인들은 프로그램은 보지 않을지언정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BBC의 존재 자체는 아끼고 사랑한다. 어디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우수한 프로그램을 만든다는 자부심에서다.

이들은 수신료 폐지가 BBC의 존립 기반을 흔들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한다. 지난해 9월 한 정부 보고서에 따르면 수신료 납부자의 대다수가 “현재 제공되는 서비스를 위해 수신료를 지금 수준보다 더 낼 수 있다”고 답했다. BBC만큼은 시청률 경쟁에서 한 발 물러나 건강한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한다는 공감대도 조성돼 있다.

BBC가 영국 문화의 상징이라고 여기기는 정치권도 마찬가지다. 한 장관은 BBC가 영국의 대외 이미지 조성에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다며 “BBC가 외무부보다 낫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차기 방송 허가 갱신까지는 아직 10년이 남았다. 그 사이 일어날 방송환경의 변화는 예상보다 훨씬 더 급격할 수 있다. BBC는 2017~2026년에도 수신료를 받는다는 게 목표다. 오직 시청률에만 목을 매는 저질 프로그램의 홍수 속에서 BBC가 공영성을 담보하는 최후의 보루로 남을 수 있을지 전 세계 시청자들이 주목하고 있다.

<국제부/최희진 기자 dais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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