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고온 ‘춥지 않은 겨울’로 신풍속도… 곰은 겨울잠 못 이루고 스키장은 울상

겨울인데도 날씨가 춥지 않아 북극곰들이 동면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유럽 날씨가 수상하다. 지난해 같으면 벌써 눈으로 하얗게 덮였을 알프스 산맥이 여전히 초록빛이다. 12월 기온이 1300년 만에 가장 높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상 고온 현상이다. 외신들은 연일 ‘가장 따뜻한’이라는 수식어를 동원하며 기상 이변 소식을 전하고 있다. 따뜻한 겨울은 생태계를 교란시킨다. 동면에 들어가야 할 곰들이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게 대표적 사례다. 이유는 길게 물을 것도 없이 기후 온난화 탓이다.
모스크바는 영상 10도 한겨울 러시아는 추운 날씨로 유명하지만 올해 겨울은 예외다. 기상관측이 시작된 1879년 이래 가장 따뜻하다. 12월 15일 모스크바의 낮 최고 기온은 영상 9.3도였다. 12월 평균 기온이 영하 5도인 것과 비교하면 매우 높은 수치다. 보통 영하 16도를 기록하던 시베리아도 올해는 겨우 영하 3도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겨울, 두툼한 털모자와 털코트로 중무장한 러시아인의 이미지는 옛날 얘기인 셈이다.
이와 같은 기상 이변이 일어나는 곳은 러시아만이 아니다. 아이슬란드부터 그리스까지 유럽 전역에서 유사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불가리아, 폴란드, 헝가리, 라트비아 등 동유럽 국가 대부분이 눈 구경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스웨덴, 핀란드 등 북유럽 국가도 울상이다. 크리스마스 당일 스웨덴의 예상 기온이 영상 11도.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꿈도 못 꿀 일이다.
날씨가 이처럼 따뜻하다보니 웃지 못할 일들이 생긴다. 모스크바에선 이 겨울에 꽃이 피었다. 눈이 내리지 않은 탓에 숲에서 버섯을 따는 일도 가능하다. 시베리아 추코트카 지역의 북극곰들은 해안가에 빙하가 얼지 않아 북쪽으로 이동하지 못하고 있다. 추코트카 주민들은 느닷없이 불쑥 나타나는 사나운 북극곰 때문에 공포에 떨어야 한다.
시베리아 곰이 이런 상황인데 따뜻한 남부 유럽에 사는 곰들은 어떻겠는가. 동물원의 곰들은 일찌감치 동면을 포기했고 스페인 북부 야생에 살고 있는 곰 130여 마리도 겨울잠을 잊은 채 어슬렁거리고 있다.
따뜻한 겨울은 레포츠 업계에도 타격을 주고 있다. 스키 리조트에 눈이 내리지 않는 데다 인공눈을 만들어도 얼마 못 가 다 녹아버린다. 오스트리아는 알프스 산지의 죌덴에서 개최할 예정이던 알파인·크로스컨트리 스키 월드컵을 눈 부족 때문에 취소했다. 오스트리아에서 겨울이면 가장 붐비던 스키장 한 곳은 리프트 12개 중 7개만 가동하고 있다. 아예 개장하지 않은 리조트에 비하면 사정이 나은 편이다.
이탈리아 역시 스키를 탈 만한 리조트는 절반 가량이다. 일부 리조트 대표들은 “정부가 비상 사태를 선포하고 사업 손실분을 보상해줘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500년 만에 가장 따뜻한 겨울을 맞이한 독일의 스포츠 업계도 피해가 크다. 스위스 스키 선수들은 월드컵을 준비하기 위해 아예 캐나다로 전지 훈련을 떠났다. 알프스라는 천혜의 자연환경을 코앞에 두고 있지만 올해는 무용지물이다.
스키 리조트들은 고육책을 마련했다. 스키 대신 하이킹이나 골프로 손님을 끌고 있는 것. 이상 고온 현상은 스키 팬들의 즐거움과 리조트 업주들의 수입, 동물들의 겨울잠을 모두 빼앗아갔다.
이름 뿐인 기후변화협약 기후 온난화가 향후 인류에 재앙을 초래한다는 것은 이제 익숙한 이야기다. 각국 정부는 온난화에 대한 해결책을 고안하는 것이 유권자들의 표와 직결된다는 점을 알고 있다. 그중 영국은 온난화 문제에 가장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이고 있는 나라다.
고든 브라운 영국 재무장관은 세계은행 부총재 출신인 경제학자 니콜라스 스턴 경에게 의뢰해 온난화 연구보고서를 작성하게 했다. 700쪽 분량의 ‘스턴 보고서’에 따르면 국제사회가 온난화를 방치할 경우 전세계 국내 총생산(GDP)의 20%에 달하는 9조6000억 달러의 비용이 발생한다. 1·2차 세계대전의 비용을 넘는 수치다. 이 보고서는 또 지구 기온이 산업혁명 이전 수준보다 2도 올라갈 경우 수억 인구의 가옥이 침수되고 전 세계 생물종의 15~40%가 멸종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에 따라 영국 정부는 배출 가스가 많은 교통수단에 환경세를 물리는 등 온실 가스량을 줄이기 위한 대책 마련에 나섰다. 우선 2050년까지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1990년보다 60% 줄일 방침이다.
프랑스에서도 200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많은 정당들이 ‘지속가능한’ 환경정책을 쏟아내고 있다. 여당의 유력 대선후보인 니콜라 사르코지 내무장관은 환경운동에 매진하고 있는 앨 고어 전 미 부통령과 만나 “지속가능한 개발과 환경보호는 근본적인 문제”라며 “녹색당의 전유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각국 정치인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목청을 높이고 있지만 세계는 이미 온난화를 막기 위한 규약을 가지고 있다. 1997년 채택된 뒤 우여곡절을 거쳐 2005년 공식 발효된 교토 의정서다. 38개국은 이 의정서에 서명하며 2008~2012년 사이에 온실가스 배출량을 1990년보다 평균 5.2% 감축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현재까지 성적표는 형편없는 수준이다.
당초 온실가스의 7%를 줄이겠다고 했던 미국은 자국 산업보호를 이유로 2001년 의정서 서명을 철회했다. 전 세계 온실가스의 30% 이상(배출량 1위)을 배출하고 있으면서도 뒷짐만 지고 있는 셈이다. 역시 만만치 않은 양의 온실가스를 뿜어내고 있는 중국(2위)과 인도(4위)는 자국의 배출 규모가 미국보다 미미하다며 버티고 있다. 교토의정서의 실효성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이유다.
온난화가 몰고 올 생태적 재앙과 경제적 손실에 관한 보고서는 이미 차고 넘치는 수준이다. 문제는 말만 요란할 뿐 온난화를 막기 위한 실천이 뒤따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2013년부터 시작되는 제2차 이행기간에는 의무 감축량이 더 강화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미국이 불참한 데다 다른 선진국들도 이후의 대책을 논의하는 데 열성을 보이지 않아 관련 회의는 거의 진행되지 않고 있다.
영국이 스턴 보고서 발표를 계기로 교토 의정서를 대체할 새로운 국제 협약을 추진할 예정이지만 미국 조지 부시 행정부의 임기가 끝나기 전에는 논의가 헛바퀴를 돌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이다.
<국제부/최희진 기자 daisy@kyunghyang.com>